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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아름다움보다 숫자가 먼저 보이는 어른들에게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소리치며 감탄합니다. “아, 참 좋은 집이구나!”

 

- 《어린 왕자》

 

 

최근 김환기 화백의 전면점화가 840만 달러(한화 약 123억 원)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앞다투어 보도되었다. 기사의 헤드라인에는 ‘경매’ ‘123억 원’ ‘낙찰’ ‘두 번째로 비싼 한국 그림’이라는 키워드가 줄 세워져 있었다. 기쁜 소식에 흐뭇함도 잠시 ‘저 금액이면…” 하는 속물적인 생각으로 기사에 첨부된 그림을 훑어보던 어느 날의 오후가 또렷하다.

 

그 즈음, 제목부터 강렬하게 "예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책 《예술은 죽었다》를 만났다. 책 제목을 본 순간, 그 기사를 읽은 후 비싼 낙찰가만 머릿속에 남겼던 오후가 떠올라 자연스레 책을 펼쳐 보게 되었다.

 


예술은 죽었다_2.jpg

 

 

책은 먼저 왜 예술이 우리 삶에서 멀어졌는지 이 시대의 문제점을 짚으며 시작된다. 저자는 현대의 예술이 '자본주의'와 '목표지향적 사고'로 인해 점차 우리의 삶과 분리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술을 ‘순수 예술’ ‘대중 예술’ 등으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순수 예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려운 예술, 접근하기 쉽지 않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작품이 ‘순수 예술’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대개 큐레이터, 평론가, 컬렉터와 같은 예술계 권위자들의 목소리다. 어느 순간 예술은 소위 예술 ‘엘리트’들에게 인정받아야지만 예술계에서 살아남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며, 비싼 가격으로 경매장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은 원래 창작자의 내면에서 시작해 관객과의 대화로 완성되는 여정인데, 오늘날에는 미술관 전시나 저명한 갤러리의 선택이라는 ‘도장’이 찍혀야만 인정받는다. 이런 현실은 예술을 대중의 삶에서 분리하고, 소수의 손에 의해 정의된 취향과 권력에 얽매이게 한다.

 

- 65쪽, 〈자본주의와 목표지향주의의 함정〉

 

 

오늘날 우리가 ‘순수 예술’이라 부르는 예술 형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과거의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늘 우리 삶과 맞닿아 있었다. 예를 들어, 성당의 벽화는 오직 신앙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는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작품의 시작에는 언제나 ‘예술’ 이전에 ‘삶’이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얼마에 팔렸는지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듯, 요즘 예술계에서는 어떤 작품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지가 중요한 화제인 듯하다. 이 책에는 작품이 NFT(Non-Fungible Token)로 디지털화되어 거액에 팔리는 사례가 소개된다. 작품의 원본도 아닌 그저 작품으로 연결되는 '링크'가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하나의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 소비되기 보다 투기의 대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예술의 초상이다.

 

이러한 현실이 곧 예술이 점차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작품은 예술의 껍데기일 뿐


 

그렇다면 죽어가는 예술을 다시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작품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은 예술의 껍데기에 불과하며, 예술은 작품을 만든 예술가로부터 시작해 그 작품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관객에게까지 이어지는 상호작용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서두가 자본주의와 예술 엘리트주의가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흐려놓았는지 짚었다면, 다음 장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시선을 돌린다.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는 점차 예술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지만, 예술은 원래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던 것임을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세르비아의 행위 예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다. 그는 “신체를 예술의 도구로 삼아 감각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다음 두 작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리듬 0〉은 장미, 깃털, 가위, 칼, 심지어 실탄이 장전된 총과 같이 72개의 물건을 테이블에 배치하고, 관객들에게 6시간 동안 서 있는 그를 향해 하고 싶은 것을 하게끔 만든 작품이다. 물건이 놓여 있던 테이블 위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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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0〉 테이블 사진 ⓒMarina Abramović

 

 

안내.

테이블 위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무언가 할 수 있는 72가지의 물체가 있습니다.

 

공연.

나는 물체입니다.

이 시간 동안 나는 모든 책임을 집니다.

 

기간: 6 시간 (오후 8시 - 오전 2시).

 

*출처. 〈리듬 0〉 위키백과

 

 

그의 또 다른 작품,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3개월 동안 매일 7시간 이상 테이블에 앉아 관객을 한 명씩 마주하며 눈을 맞추는 행위 예술이었다. 그는 3개월, 7시간의 시간 동안 한 테이블에 앉아 자신 앞에 앉은 상대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고요한 호수의 표면 같은 상태인 그와 달리 마주 앉은 관객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울고, 웃고, 그의 눈을 응시하거나 피했다.

 

그 앞에 앉은 사람과 둘을 지켜보는 관객 모두는 작품을 감상하고 자리를 떠나는 관찰자가 아니라, 감정과 시간을 나누는 공유자가 된다. (여담으로, 이 예술은 동요 없이 관객을 맞이하던 아브라모비치가 옛 연인인 울라이를 마주했을 때 보인 감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큰 화제가 되었다.)

 

책에 소개된 또 다른 사례 중 중국의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작업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는 쓰촨 대지진 때 국가가 숨기려 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작품, 세계 난민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 등 사회와 예술을 긴밀히 잇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이처럼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그를 통해 저자가 말하는 바는 간명하다. 작품은 벽에 걸리고 그를 바라보는 수동적인 감상, 그 작품의 값어치를 따지는 시선과 휘황찬란한 언어로 포장된 비평에서 벗어나 관객에게 직접 닿아 그의 삶에 들어가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예술은 결국 다른 몸이 살아낸 세계를 우리 몸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행위”이며, 이는 예술의 본질이 타인과 세계를 '보는' 눈을 넘어 '이해하는' 눈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술을 삶의 한가운데로


 

자본주의와 예술 엘리트주의의 문제를 넘어서, 예술은 기술 발전과 함께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SNS의 발달은 예술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SNS를 통해 보다 쉽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평단에 인정받지 않더라도 대중에게 ‘좋아요’를 받고 ‘공유’된다면 이름과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창작자와 관람자 사이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SNS는 예술의 민주화를 가져온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창작자들 역시 어린 왕자가 바라보던 ‘어른’처럼 숫자에 사로잡히게 되기도 했다. 작품의 가치를 그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닌, 돈과 조회 수, ‘좋아요’ 수와 같이 숫자로 매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예술이 예술 그 자체로 남지 않고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우리 가까이에서 예시를 찾아보면 더 와닿는다. 70~80년대 시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선율로 사랑받던 대중음악은, 오늘날 쇼츠 같은 SNS에 특화된 짧고 중독성 있는 음악으로 빠르게 소비된다. 물론 이는 매우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다. 하지만 SNS가 창작자의 감각적 깊이를 얕게 만들 위험 또한 함께 가져왔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AI의 등장은 또 어떤가. 요즘 AI는 구체적인 명령(프롬포트)만 입력하면 원하는 그림체의 이미지를 손쉽게 만들어낸다. ChatGPT는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그림체를 흉내 내어 사람들의 사진을 그림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뉴스 기사에 글과 함께 삽입되던 개성 있는 일러스트가 점차 AI로 생성한 그림으로 대체되는 모습도 이제 낯설지 않다.

 

이런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AI가 예술가를 대체할 암울한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나 이 책은, AI가 예술의 종말을 가져오기 보다는 현대인들에게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사진의 발명이 회화의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 여겨졌지만,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사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겼고, 각자의 다양한 답을 찾아 나가게 했듯이 말이다. AI 역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사람만의 고유한 감각과 경험을 담은 예술이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그렇게 예술은 여러 번 죽음에 가까운 위기를 마주했으나,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 남아 왔다. 이 책은 그 생존의 열쇠가 결국 예술을 향유하고 즐기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을 건넨다. 예술이 그저 예술로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죽지 않고 끝끝내 살아 있을 것이다.

   

《예술은 죽었다》는 “분홍빛 벽돌집과 제라늄 화분을 보았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안의 ‘어른’을 잠시 내려놓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다시, 어린 왕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예술은 죽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예술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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