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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김종관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가 11월 5일, 2025 런던 한국 영화제(London Korean Film Festival 2025)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영화는 서울 종로, 개발되지 않은 저층 건물과 문화 공간이 어우러진 서촌 일대를 배경으로 한 3편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종관 감독은 시사회에서 영화를 ‘소설집’에 비유했다. 그의 소설집은 서촌을 누비는 화가 한경, 네일아트 디자이너 보라, 무명 배우 마리의 이야기를 통해 열정, 방황, 치유의 서사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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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I 사우스뱅크에서 열린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시사회에 참여한 김종관 감독과 현수, 보라의 단골 술집 사장 역을 맡은 연우진이 프로그램 진행자 안톤 비텔의 질의에 응답하고 있다.

직접 촬영.

 

 

 

꽃 피는 봄과 뜨거운 여름,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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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과 2막은 각각 화가 한경과 네일아트 디자이너 보라가 겪는 관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보다는 다소 민망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인 날것에 가깝다. 1막의 화가 한경은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정체기를 겪고 있는 소설가 현수에게 마치 사랑을 통달한 양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서는 연애를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해 혼자 있는 여성들을 발견할 때마다 불쑥 말을 건네며 서촌을 떠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연락이 끊겼던 여성과 재회하게 되는데,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같은 날 ‘번따’로 약속을 잡았던 다른 여성과의 선약을 미루는 모습은 어딘가 찌질(?)하면서도 인간적이다.


*김종관 감독은 시사회에서 한경을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는 조금 다른 ‘코리안 데이트 헌터’라고 표현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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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의 네일아트 디자이너 보라는 확고한 취향이 있다. 퇴근 후 단골 술집에서 즐겨 마시는 위스키가 있으며, 마신 다음 날에는 향긋한 살 내음이 나서 좋다는 나름의 이유도 있다. 그리고 작가를 겸하고 있는 단골 술집의 사장과 교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새로 사귄 여자 친구가 있으나 여전히 자신에게도 미련이 있는 아는 오빠 A와 단골 술집에서 만난다. 남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보라에게 여지를 주었고, 보라는 그런 그를 밀어내지만 가게를 나선 후 둘은 결국 키스를 하게 된다. 정신이 번쩍 든 보라는 다시 단골 술집으로 돌아가 태연하게 사장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며 관계의 줄타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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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썸’ 혹은 연인이 되기 전 단계에 있을 법한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의 방황과 불완전함을 가볍게 풀어내었다. 한경에게 사랑이란 영감의 원천이자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지만, 현실에서 그는 그저 연락이 오는 대로 이성을 만나며 명확한 이상형의 기준도 없어 보인다. 보라는 언뜻 보면 아는 오빠 A와 마주할 때도, 술집 사장과 대화할 때도 당당한 태도와 확고한 주관으로 대화를 이끈다. 그러나 관심 있는 대상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상대를 불러내는 동시에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는 행동에서 부족한 자기 확신이 드러난다. 이들의 면모는 비단 남녀관계뿐 아니라 인간이기에 지니고 있는 각자의 모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따스한 호의가 스며든 한겨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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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서촌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3막은 무명 배우 마리의 하루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마리는 서촌의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카페에서 책을 읽고는 와인바에서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현재 배우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어느 날 일기를 쓰던 와인 바에서 한 여성이 마리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넸다. 그녀는 마리의 연기를 좋아하는 팬으로, 마리가 자주 머물던 와인 바 건너편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예전부터 그녀를 지켜봤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리는 선물 받은 꽃다발의 무게에서 어떠한 생명력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관객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마리의 이야기다.


3막에서는 주인공인 마리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점이 드러난다. 3막 중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던 마리는 배우 생활 중 알게 되었던 감독을 우연히 마주친다. 마리가 ‘문 감독님’이라고 부르는 여성은 마침 그녀가 맡아주기를 바랐다며 한 배역에 대해 설명한다. 배역의 이름은 ‘마리’. 마리처럼 무명 배우이자 서촌에서 일상을 보내며 매일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문 감독은 ‘마리’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 알려준다. ‘마리’는 약 1년 전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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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감독이라는 인물이 개입한 시점부터 관객은 두 명의 마리를 지켜보게 된다. 무명 배우 마리와 그녀가 연기하는 문 감독의 ‘마리’다. 화면 속 일상을 보내는 검은 코트의 여성이 현실의 마리인지, 문 감독이 만들어낸 ‘마리’의 일부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나아가 ‘문 감독’의 인물을 연기하는 마리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정체기를 보내는 마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의 설정인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꽃다발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은 정체기의 극복, 상실의 회복, 다시 세상으로 나올 용기 등 여러 층위의 치유를 암시한다.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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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를 구성하는 3막의 이야기는 계절의 순환으로 전개된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봄, 한경은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서촌을 누빈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한여름 밤, 보라는 아는 오빠 A와도, 마음에 두고 있는 단골 술집 사장과도 열정을 다한다. 공기마저 위축된 듯한 한겨울, 마리는 한 팬의 작은 호의로 다가올 봄을 맞이하며 새로운 다짐을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방황하고 정체되지만 그럼에도 열정을 다하고 회복하며 나아가는 인간사를 보여준다.


서촌 길거리, 흐린 창문 너머 갤러리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누군가는 언젠가 이루게 될 원대한 꿈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노트북을 두들기는 누군가는 방황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한 여정 중일지도 모른다. 흐린 창문 너머의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언가를 찾고 있는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무언가를 극복하고 있는가?

 

 

스틸컷 출처: 런던한국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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