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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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나침반] 시리즈

우리가 인간다움을 지속하며

도래하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화예술을 나침반 삼아 그 방향을 해석합니다.

 


 

1) 욕구 그 이상의 욕망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한다. 멀게는 미래를 가늘게 점쳐보는 것부터 시작해, 가깝게는 당장 해결할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까지. 어쩌면 삶이라는 게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도 없이 선택지를 고르는 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이런 선택하는 행위의 중심에는 늘 욕구가 있다. 본능적으로 결핍을 채우려는 단어, 욕구는 매슬로우의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생리적 욕구’를 들었다. 생존과 직결되어 신체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먹거나 마시는 행위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욕구와 욕망의 차이는 ‘필수적’이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배가 고파 맛있는 음식을 떠올렸다고 해보자. 결핍을 느껴 해소하고자 함은 욕구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을 추가로 갖고 싶다는 열망을 느낄 땐 ‘욕망’이 된다. 배가 불러 욕구가 충족되었음에도 더 맛있는, 더 나은 음식을 찾고자 할 때는 아예 다른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몇 전문가들은 사회를 분석한 자료에서 이러한 욕구가 채워질수록 욕망은 끝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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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영화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주제다. 대표적으로, 최근 개봉한 영화 <서브스턴스>가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젊고 더 예쁜 나의 모습인 ‘수’를 욕망한다. 엘리자베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외적으로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젊고 건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소비하려는 자본주의 사회와 미디어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철저히 자신을 시장 경쟁 속 하나의 상품으로서 여기고, 미(美)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자신에게 조작된 아름다움을 주사기로 투여한다.

 

그러나 약물을 주입할수록 엘리자베스 자신의 본래 모습은 점차 기괴해져만 간다. 영화에서 묘사된 뒤틀린 뼈와 흘러내리는 피부는, 중독을 넘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운 비주얼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결말들은, 되레 우리에게 과거와 대조해 보며 회귀하고만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스크린 안에서는,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에서 더 나아가 그 이상을 가지려는 욕망만 존재한다. 과거 엘리자베스가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임하고 있는 자기 삶 그 자체를 사랑했던 짧은 순간은 흐릿한 잔상일 뿐이다.

 

 

 

2) 소비주의를 만났을 때, 착취와 과잉


 

책 <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에서는 이 ‘욕망’이 보통 사회문화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향한다. 그런 맥락에서 살펴봤을 때, 오래전부터 욕망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보이는 모습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깊은 연관성을 보여왔다. 성당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다채로운 오색 빛깔로 물드는 햇빛을 보고, 사람들은 ‘여러가지 빛깔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있다고 느낀다. 이로써 개인이 ‘흙덩어리’로서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는 것이다.

 

더 나아가 거울, 화장품, 대리석, 진주 등 저자가 제시한 목차들을 따라 걷다 보면, 한 가지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건 바로 여태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느껴 소비한 것들이 일종의 가면 같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담담한 필체로 벗겨내 마주한 이면에는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잔혹함이 숨어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프리저브드 플라워’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보관이 쉽기에 언젠가부터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사실은 유전적 요소를 변형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허상이라면 어떨까? 이뿐만이 아니다. 고급스러운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로 다수 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아름다움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광부와 아동 착취, 식민지 산업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다. 무자비한 사냥을 일삼으며 코끼리의 상아로 공예품을 만드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번에는 고운 비단이 들어오게 된 실크로드를 함께 걸어보자. 가히 혁명적이었던 비단은 예쁘다는 가치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으로 소비주의 성향이 그 위에 또 다른 프레임으로 씌워지게 됐다. 이런 현상을 두고선, 저자는 교수의 말을 빌려 말한다. 비단이 ‘엘리트 계층을 식별하는 능력, 모방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능력, 사회질서의 규칙을 가시화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라고 말이다. 또한 ‘과잉’을 ‘필요의 역사가 아니라 풍요의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소비재의 본질 그 이상을 욕망하고 있는 셈이다.

 

드넓은 해변가에서도 과잉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발아래에 자글거리며 밟히는 수많은 조개껍데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진주라는 욕망을 얻기 위해 조개는 끝없이 발굴되고 채취되고, 버려진다. 복제되고 재창조되는 사회현상이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관조하는 대신, 그 많은 양을 품에 넣고 싶다는 충동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원하는 것을 양껏 갖고 싶다는 마음임을 한편으로는 알고 있으나, ‘넘치는 모래알 수만큼 축적되는 광기’라고 책은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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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미술사에서도 우리의 자본, 소비주의 문화로부터 대량 생산된 ‘복제’를 다룬 ‘팝아트’가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앤디 워홀이 그린 ‘캠벨 수프 깡통’이나 ‘마릴린 먼로’ 등이 있다. 이렇게 소비되는 상품이나 유명인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대중문화로서 한 걸음을 가까이했다. 이처럼 누구나 다 자유롭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민주화를 찾았지만, 이 상업화는 역설적으로 ‘피상성’이라는 결과를 낳게 됐다.

 

 

 

3) 존재함을 소비하는 것


 

우리 사회에서도 미디어의 영향으로 느낄 수 없는 욕망이 넘쳐나고 있다. 화면 속의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카메라 필터를 사용해 연출하기도 한다. 저자의 시선으로 이 현상을 바라보면 그 안에는 ‘진실’이 없다. 예쁘게 입고 꾸미는 삶이 누군가의 욕망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저자의 말 또한 마찬가지다. 2차원적인 모습들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수많은 얼굴들은 화면 대신 눈앞에 ‘살아있기에’ 아름답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느끼는 모든 경험과 감정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욕망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대신 책 <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의 저자 케이티 켈러허의 말처럼, 우리에겐 '소비주의를 지양하는 욕망'이 필요한 것이다. 책 속에서 추한 역사와 그를 다루려는 태도를 어깨너머 배우게 되면, 욕망에 따른 선택과 소비 생활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잠시 생각의 창을 열어 환기한 후 옷장을 연다. 그리곤 먼지 쌓인 옛 옷을 탈탈 털어 나만의 방식으로 새로이 수선하는 상상을 해본다. ‘힘껏 음미한 후 가볍게 놓아준다.’라는 한 구절처럼 말이다.

 

그렇게 현실 속 잊고 있었던 순간을 찰나에 만끽하며 믿어보는 것. 그 경험들이 켜켜이 쌓일 때 진실한 아름다움을 정신적으로, 감각적으로 더욱 풍성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건강한 욕망으로 소비하는 젊은 '존재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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