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나는 뒤척이고 흐릅니다 나는 무엇일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때로 저항하고 양보하고 양보하고 저항하며 엎치락뒤치락, 아니 스며들었다가 이내 피붓결을 따라 갈라집니다. 나는, 나는 나비입니까, 아니면 파도입니까.
![[빈체로] 포스터_앨런 길버트_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30153739_wrbatxfl.jpg)

오케스트라 연주를 뒤로 하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이 노래는 흰나비의 날갯짓과 파도의 뒤척임 중에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그런 게 마치 중요한 문제인 양 손끝을 가지런히 세워 다퉜다. 정반대에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닮아서 나는 문득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은 아니었는지 생각했다. 그 둘은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혹은 어떤 사전에서는 기꺼이 동의어로 쓰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표준 우리말 사전으로 삼고 싶다.
나는 귀갓길에 하염없이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윽고 성난 목소리에 섬찟 깨어나버렸다. 삑, 하는 단조로운 버스 기계음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도시를 휘젓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전조등 불길 속에서 쿵쿵 발을 구르는 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의학에서 보편 인간의 상으로 ‘남성’이 자리하듯, 인간사의 보편, man(인간)의 자리는 항상 남성의 것이었다. 여성은 항상 ‘나’와 반대되는 타자로, 이성보다 감정의 영역에 더 많이 영향받는다 그려졌다. 역사에서 클래식 작곡가로 여성이 이름을 떨친 경우는 거의 없다. 전무에 가깝다. 나에게 음악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영역이었지만 동시에 미학에서는 철저한 계산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성의 영역이었다. 그리하여 음악은 남성에 의해 쓰이고 구성되고 연주되었다. 클래식 음악사는 거의 남성의 역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음악가의 음악적 성취나 능력치와는 무관하게도, 심지어 여성 음악가는 전혀 ‘classic’의 측면에서 고려되지 않았고 고려할 가치로서의 무엇도 차지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여성이 역사를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전’이라 불릴만한 역사적 축을 갖추지 못한 게 아니라, 성취가 모자란 게 아니다.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축 자체가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항상 언제나, "열등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비’에 지나지 않았다. 바다 앞에 선 나비. 그 정도.
앨런 길버트와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가져온 첫 곡, ‘안나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가 놀라웠던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사에서 여성의 자리란 언제나 비어 있다 못해, 아예 이름을 가질 빈칸조차 갖지 못한 커서의 깜빡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바다>를 연주하기 전, ‘여성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의를 듣자마자, 이 모든 작의의 소개까지 이 곡의 완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이들은 ‘여성’에게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짜인 프로그램을 보자 나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브람스와 드보르자크는 흔히 낭만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작곡가들이었다. 낭만주의란, 섬세하고 내밀한 개인의 감정을 세계로 확장해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과는 확연히 거리가 멀다. 그것은 머리보다는 몸에 가까우며, 이성보다 감정이고, “남성적”이기보다 “여성적”이다.
나는 이 공연이 남성 주류의 음악사를 재편하기 위한 어떤 몸짓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권위적인 힘을 발휘하는 클래식 연주회에 발을 바닥에 쿵쿵 구르거나 소리치는 것마저 ‘클래식’에 포함하는 안나 클라인의 과감한 시도는 찬란했다. 몸을 구르고 진동을 악기와 함께 느끼는 연주자들은 바이올린 활이 휘어지는 방향마다 몸을 뒤틀고 움직이며 마치 한 폭의 파도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은 마치 나비의 날개에서 파도의 뒤척임으로 울림이 거대하게 번지는 듯했다. 그것은 공연장을 빠듯하게 채웠다.
공연을 보고 나서 나는 이제 「바다와 나비」를 이렇게 읽게 되었다.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흰나비는 어릴 적에 갈라찢긴 샴쌍둥이를 맞이하였다.
바다를 향해 날갯짓한다.
흰나비는 기꺼이 바다를 마주하고, 바닷물에 날개가 젖어 기쁨에 지쳐 돌아온다.
파도가 피어났다 지듯이, 그것이 태어나고 죽듯 나비도 그렇게 따른다.
죽음 역시 생의 맥을 만드는 한 고리라는 것을 흰나비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나비는 더는 수동적이지 않다. 적극적으로 날아든다. 여성들의 힘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눈앞에, 그리고 몸짓으로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한다. 그것은 태어났다가 동시에 소멸하지만, 곧 그 소멸이 생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한번의 눈짓에 지나지 않고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