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하 시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2020 신춘문예 수상작 시집에서였다. 등단작 「침착하게 사랑하기」를 읽은 뒤 SNS에 시의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그 계정은 팔로워가 없었고, 그래서 누군가의 알림도 오지 않았는데, 몇 주 뒤 시인이 좋아요를 눌렀던 것이 기억난다.
차도하의 시집에는 유독 ‘쓰는 행위’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많은데, 인용 소감에도 언급하였듯 그것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 나는 * 것이다
이렇게 겨우 힘을 내어 살면 무엇이 되는 걸까. 무엇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아서 죽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웃음 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죽기엔 아깝다. 글을 잘 쓰니까. 글을 잘 써서 발표도 하고 책도 내고 어린 내가 그걸 읽고 오래 간직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자유니까. 누가 이걸 하나하나 뜯어보며 아니라고, 그게 죽지 못할 이유는 못 된다고 따져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살 거니까.
시 당선 소감을 써야 하는데 죽느냐 사느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나에겐 이게 비슷한 이야기인가 보다. 사실, 시는 그냥 뜯어 쓰는 마스킹 테이프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시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든 쓸 거라는 말이다.
- 차도하, 「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소감」 中
시집, 수상소감, 인터뷰, 산문집을 통틀어, 시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나는 살/쓸 것이다.” 라는 다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 속 등장하는 이미지와 정념은 그의 삶을 구성한 것들과 매우 가깝다. 그러나 그 전부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의 전부는 아니다.
쓸 수 있는 것은 곧 ‘안다고 여겨지는 것’과도 직결된다. 일부조차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쓸 수는 없다.
김승일이 발문에서 밝혔듯, 차도하의 시 쓰기는 ‘상상하기 위한 시 쓰기’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나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이 가진 몇 없는 현실을 공개해야만 한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구분하기 이전에, 말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가진 본능이니까.
차도하가 쓰는 시는 시를 위하지도, 그 자신을 위하지도 않는다. “그냥 뜯어 쓰는 마스킹 테이프”처럼, 마구잡이로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치열한 규칙과, 미학적인 목소리와, 불화하는 시적 자아가 열렬히, 꾹꾹 눌러쓴 연필 자국처럼 매우 치밀하게 완성되어 있다.
죽음, 사랑, 체벌, 폭력, 가족, 신앙, 여자, 모녀, 부녀, 칼, 세상. 살아 있어서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 그 모든 부조리의 모양새. 이런 것들을 도대체 왜 써야 할까. 왜 들여다봐야 할까. 어쩌면 그것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살아 있으니 그것들을 만나고, 어떻게든 이 세상을 애써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나. 차도하는 끝내 이해하기 전에, 알기 전에 먼저 말한다.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되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지금 느끼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 그저 용감하게 외치는 것이다. 그럴 때 완성되는 세상이 끝내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더라도.
2. 미래의 손
이 시에는 공원이 등장하지 않고, 시인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랑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에는 공터가 등장하고, 중학생이 등장하며, 등장할 수 없는 사랑이 등장한다.
중학생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공원은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공터는 비어 있는 터이기 때문에 공터. 그렇다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 공터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중학생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는 아빠에게서 훔친 것. 아빠는 사랑할 수 없는 것. 가족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 친구도 애인도 사랑할 수 없는 것. 선생과 제자라면, 신과 신도라면 더더욱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아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중학생이 생각하는 동안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 가고. 중학생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담배와 연기를 바라보는 동안. 세상의 필터도 조금씩 타들어 가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지워지고, 비어 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공터에 덩그러니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울거나.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만이 남아
세상은 한층 조용해졌고. 중학생이 문득 고요를 느끼고, 담배를 버리고 신발로 그것을 짓이기고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은 저녁에서 밤으로 색깔을 바꾸고.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원래란 뭐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중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중학생은 담배 냄새가 빠질 때까지 산책을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담배 냄새는 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이 하는 질문은,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들게 한.
그러나 우선은 공터에서 빠져나와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산책을 하기로 하고,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다가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 「미래의 손」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미래의 손」은 차도하의 시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이자, 메타적으로 시집의 핵심을 궤하는 시이기도 하다.
중학생 화자가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그 자체로 금기시되는 일탈 행위이다. 따라서 중학생은 공원이 아닌 공터에서 담배를 피운다.
여기서 공원은 시민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규범에 어긋나고 반하는 것들은 출입이 금지되는 공간이다.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이 그러한 존재이다.
중학생과 연결된 관계-아빠, 가족, 친구, 애인, 선생, 신-그 어느 관계도 중학생이 가진 사랑을 쏟아붓기엔 적법하지 않다. 이 모든 관계는 일종의 프레임으로, 어떠한 정상성을 전제하고 요구하는 동시에, 이미 그 정상성에서 탈락했으며, 중학생의 사랑을 온전히 되돌려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흡연으로 중학생이 ‘원래’적인 정상성을 무너뜨리자, 세계는 지워지고 남는 것은 원래 비어 있는 공터뿐이다. 공터에 있는 사람들은 “덩그러니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울거나. 쪼그려 앉아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아빠, 가족, 친구, 애인, 선생, 신-그 어떤 역할도 갖지 않고 그저 행위만을 주체로 갖는다. 정상성에서 탈락되어 이름을 갖지 못하는 무명의 존재들, 그러나 그렇기에 온전한 자기자신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터는 이처럼 이름이 없거나, 텅 빈 마음을 가져야만 허락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공원에 갈 테니까.
담배를 버리며 일탈 행위를 종료하자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여기서 ‘원래’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당위로 작용한다. 중학생은 담배를 피워선 안 되고, 아빠와 가족, 친구와 애인, 선생과 신을 사랑해야 한다.
중학생은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산책을 하고 집에 들어감으로, 그 ‘원래’에 부합하고자 노력하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담배 냄새는 빠지지 않을 것이고, ‘원래’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뒤따라올 체벌을 두려워하며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다.
이 체벌은 단순히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것이 아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든” 지속적인 학대이다. 이 중학생에게 희망이란 영 요원해보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희망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찔러넣은 주머니 속에서 누군가 중학생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 손은 가족, 친구, 애인, 선생, 신도 아니다.
시를 쓰게 될 중학생 자신의 ‘미래의 손’. 여태 이 시 바깥에서 중학생 화자를 관망하던 시인이 겨우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민 손이다. 이 불안한 중학생이 과거의 자기자신에게까지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차도하는 다음 연에서 또다시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라며 자조하고 그 손을 놓아버린다.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는 「미래의 손」을 표제작으로 선정한 것이 차도하가 남기는 일말의 희망이라고 해석했다.
수많은 독자에게 『미래의 손』이 가닿음으로 이들이 미래로 더 나아갈 힘이 되는 메타적인 메시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이 제출한 원고에는 수록되지 않은 시라는 것이 미묘한 씁쓸함을 더욱 남긴다.
‘미래의 손’이 중학생 화자의 손을 잡아준 것처럼, 『미래의 손』을 읽는 독자와 동료 모두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처럼 애처로운 따뜻함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차도하는 계속해 살 것이다.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