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점점 끝으로 접어들고 있다. 곧 있으면 11월이 될 테고, 거리에서는 12월에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겠지. 새해의 코 앞에서 사람들은 카운트다운을 하며, 울려 펴지는 종소리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2026년을 맞이할 것이다.
이토록 박동하는 연말인데, 어째서 나는 알 수 없는 우울감과 허무함에 늘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가. 해마다 그러했다. 몇 번이나 도래했지만 몇 번이나 생경하게 느껴지는 시기, 좀처럼 모르겠는 시기. 케이크에 꽂힌 초를 불며 소원을 읊조리는 순간에도 나에게 드리우는 것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최근 자우림의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자주 듣고 있다. 마치 한 곡을 반복 재생을 하다시피 말이다. 음악을 재생하면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고픈 일도 없는데
되고픈 것도 없는데
모두들 뭔가 말해보라 해
별다른 욕심도 없이
남다른 포부도 없이
이대로이면 안 되는 걸까
연말마다 마주하는 감정들의 연유를 언어화한다면 아마도 저러할 것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앞날, 하물며 무엇이 되고 싶다 확언하지도 못하겠다. 지금도 내 안을 부유하고 있는 형상은, 생각은, 걱정은 무수하다. 하지만 무엇하나 확실치 않고 단지 추상으로 남아 있으며, 삶에 대한 커다란 욕심은 없고 그저 나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해가 지나갈수록, 어른이라는 존재에게 가까워질 수록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선명한 목표가 있고, 부단히 나아가고 있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나는 선명하지 않은 자신을 끌어안고 새로운 시작의 앞으로 다가선다. 연말의 우울과 허무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더하여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나이 강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십 대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삼십 대에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 임무는 시기별로 촘촘히 나누어져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수칙에 따르면 나에게는 철없는 아이를 탈피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온다. 당위성 있는 시절이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가슴 한편에서는 조바심을 내는 중이다.
어른의 곁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은 때때로 나는 잠식시키고야 만다. 항상 그래왔다.
나 이상한 걸까
어딘가 조금
삐뚤어져 버린 머리에는
매일매일 다른 생각만 가득히
올해는 유독 틀을 깨고 저마다의 삶을 사는 이들의 세계를 자주 마주했다.
흐릿한 삶을 끌어안고 전진해보는 사람들, 자신의 형태가 어떻든 일단 부딪혀 보는 사람들. 아무 생각 없이 유유히 인생을 유영하는 사람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아주 조금 다르다. 시간이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자라나던 나는 이제 단지 비관하지 않기로 하였다. 찰나의 절망이 온다고 하여도 그 순간 마음껏 울고 금세 결심한다. 정형화된 세상이 지금, 이 방황을 이상하다 여긴다면 기꺼이 이상한 이로 남겠다고.
이번 소원은 ‘힘껏 방황하다가 제자리 찾기’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