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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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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건 분야를 막론하고 알고리즘이 나에게 어울릴 법한 것들을 추천해준다. 인터넷상에 공유한 일상은 사람들이 서로의 감시자가 되게 하고, 범람하는 이미지의 파편은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내가 내 삶의 주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나라는 정체성도 희미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까.


2018년, 홍콩현대무용단(CCDC)의 상주 안무가였던 상지자(桑吉加, Sang Jijia)는 폴 오스터의 소설 『기록실로의 여행』 속 노인에게서 오늘의 우리를 발견하고 ‘Mr. Blank’를 창작, 초연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낯선 방에 갇혀 외부에서 주어지는 단편적인 기억과 이미지에만 의존해야 하는 소설 속 노인이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작품은 무용과 영상, 디지털 창작이 결합한 크로스미디어 공연이다. 무용수들은 강렬한 신체 언어로 감시, 기억, 정체성 등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표현했다.


홍콩에서 크게 주목받아 온 이 작품이 홍콩위크 2025@서울을 맞아 'Mr. Blank 2.0'으로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한국 관객을 만난다. 초연으로부터 7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이 변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었고, 급격히 발전한 생성형 AI는 인간의 영역이라고만 믿었던 곳을 침범해 온다. 이런 세상에서 ‘Mr. Blank 2.0’은 어떤 작품으로 한국의 관객에게 다가갈까. 지금은 홍콩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있는 상지자를 서면으로 만나 다가오는 공연에 관해 물었다.

 

 

상지자(桑吉加, Sang Jijia)


상지자는 아시아문화협회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수학했으며, 2002년 롤렉스 멘토&프로테제 예술 이니셔티브에 선정돼 독일에서 윌리엄 포사이드에게 안무를 사사했으며. 발레 프랑크푸르트와 포사이드 컴퍼니에서 조안무와 무용수로 활동한 뒤, 2006년 귀국해 CCDC, 베이징댄스/LDTX, 광둥 현대무용단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세계 유수 무용단의 위촉을 받았다.


2015~2024년 CCDC 상주 안무가를 거쳐 2025년 예술감독으로 취임했으며, 무용·디지털·드라마투르기를 융합한 창작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2023년 홍콩 공연예술아카데미 명예 펠로우십, 2024년 홍콩 댄스 어워즈 공로상과 홍콩 예술발전상 ‘올해의 예술가(무용 부문)’를 수상하며 아시아 현대무용의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안무작으로 Mr Blank(2018), Re-mark(2018/2019), Pa | Ethos(2015/2022), Meeting In-between Time(2022), Stream of Dust(2023), As if Snowing(202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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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연을 앞두고 계신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어떤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지 들려주세요.


처음 서울에서 공연했던 것은 1990년대였습니다. 그때는 다른 안무가의 작품으로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ICF)에 참가했는데, 관객들의 뜨거운 열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이지만, 이번에는 제가 직접 창작한 작품을 선보이게 되어 설레고 기대가 큽니다.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 작품이 어떤 공명을 만들어낼지 무척 궁금합니다. 한국에는 훌륭한 무용수와 안무가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이 단순한 작품 발표에 그치지 않고, 서로 교류하고 영감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뜻이 통하는 창작자들과 새로운 협업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초연 이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팬데믹, 생성형 AI의 등장 등 세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공연에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반영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무대 위 ‘유리하우스’의 구조는 들어갈 수만 있고 나올 수 없는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폐쇄된 공간은 자연스럽게 팬데믹 시기의 격리와 제한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시기를 함께 겪은 관객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바라보며, 여러 층위의 감정과 공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Mr. Blank 2.0’은 폴 오스터의 소설 『기록실로의 여행』에서 영감을 얻었는데요, 공연을 만들며 소설 속 ‘Mr. Blank’를 어떤 인물로 해석했고, 그것이 공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이 작품은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주인공 ‘Mr. Blank’가 밀실에 갇혀 있는 상태, 그리고 감시받는 존재로서의 처지에 주목했습니다. 그로부터 인물 해석을 발전시켰고, 무대 디자인 역시 이러한 폐쇄감과 불확실성을 시각적으로 반영하도록 구성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문학 텍스트를 신체 언어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한데,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문학 텍스트를 신체 언어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각색이 아니라, 원작의 이야기를 확장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원작에서 단 한 명으로만 언급되는 인물을 ‘Mr. Blank 2.0’에서는 동시에 무대에 등장하는 14명의 Mr. Blank로 확장했습니다. 이는 세상에 무수히 많은 Mr. Blank가 존재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삶의 어느 시점에서는 방향을 잃고 혼란을 겪기 때문입니다.

 

 

창작 과정에서 중점이 되었던 정서가 있을까요?


인물 구축 과정에서 특히 ‘불안’이라는 주제에 주목했습니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받는 자’의 관계는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인물의 내면적 불안을 극대화합니다. 각기 다른 연령의 무용수들이 자신의 신체 언어와 개성을 결합해, 저마다의 ‘Mr. Blank’를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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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은 영상과 디지털 창작의 비중도 큰데요, 이러한 크로스미디어 공연을 기획한 배경에 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원작 소설의 서사 구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소설에는 책과 감시 시스템, 그리고 책상이 등장하는데요. 그중 감시 시스템은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단 하나의 카메라만 존재했는데, 거기서 수많은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누가 보고 있는가? 누가 해석하는가? 누가 볼 권리가 있으며, 또 누가 자신을 보이도록 선택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작품의 핵심 사유로 자리 잡았고, 그러면서 지금의 크로스미디어 형식이 탄생했습니다.

 

 

유리벽의 존재와 실시간 영상장치 등의 소품은 무용수의 춤과 만나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나요?


무대 후면에는 세 개의 열린 창을 설치했습니다. 밀실 밖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힘과 이미지를 상징하고 관객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장치입니다. 또한 무대 중앙에는 도시의 감시 카메라 기둥에서 영감을 받은 장치를 매달았습니다. 여러 개의 렌즈, 조명, 스피커가 달린 이 장치는 한 장면의 핵심 오브제로, 무용수와 카메라 사이의 관계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감시의 대상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전환되는 순간, 양자 사이에 긴장감과 권력의 역학이 생겨나며 무대의 에너지를 한층 고조시킵니다.

 

 

이 공연이 동시대에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이 작품은 오늘날 인간의 내면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다음 걸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미지와 불확실성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시대 전체가 공유하는 불안과 혼란을 반영합니다.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무대가 삶의 압축본이라면 이 공연에서 표현하는 무대는 어떤 모습인가요? 이번 무대의 어떤 점이 삶을 닮았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우리는 지금 빅데이터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Mr. Blank’는 낯선 밀실에 던져진 듯한 감각을 느낍니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눈앞의 세계는 더 이상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아 헤맵니다.


한편 외부의 관찰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Mr. Blank의 모든 움직임을 엿봅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또 다른 시선에 의해 감시당합니다. 끊임없이 교차하는 ‘봄’과 ‘보임’의 행위가 공간 속에서 확대되고 중첩되어 퍼져 나갑니다.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으며, 문이 열려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작품은 바로 이 감시와 고립, 그리고 무감각해진 현실을 하나의 농축된 ‘삶의 단면’으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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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키워드로 ‘억압’, ‘감시’, ‘불안’, ‘기억’, ‘고립’ 등이 떠오르는데요, 이러한 소재를 표현하기 위한 음악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Mr. Blank 2.0'의 음악은 공연 장소마다 공간의 감정과 울림에 맞춰 조정되었습니다. 작곡가는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을 활용해 밀폐된 공간의 압박감을 구현했으며, 전체적인 음색은 어둡고 묵직하게 유지됩니다. 특히 영상 버전에서는 더욱 억눌린 정조가 강조되고, 무대 버전에서는 리듬과 선율이 더해지더라도 불안과 긴장이라는 근본적인 감각은 그대로 남습니다. 이러한 사운드는 ‘관찰하는 자와 관찰받는 자’의 심리적 상태를 청각적으로 형상화하며, 관객이 체험하는 불안·기억·감시의 주제를 음악적으로 확장합니다.

 

 

무용수의 의상은 어떤 의도로 디자인되었는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의상 디자인은 각 인물의 개성과 연령을 드러내며, 다양한 형태의 ‘Mr. Blank’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무용수마다 의상에 미묘한 차이를 두어 서로 다른 배경과 정체성을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곧 인간 존재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치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예술작품에서 디스토피아로 표현되곤 합니다. 'Mr. Blank 2.0'가 보여주는 무대도 디스토피아 같은 면이 있는데, 이런 세상을 돌파하는 희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무대에 그러한 희망의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지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디스토피아’라는 상징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어요. 따라서 무용수들은 공연 중에도 선택할 자유를 지니며, 그 ‘선택의 자유’ 자체가 희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에게는 여전히 미래를 상상하고 희망을 품을 여백이 남아 있습니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무대일 수도 있을 텐데, 어떤 부분에 유의해서 공연을 감상하면 좋을까요?


저는 한국의 관객들이 동시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예리한 감각과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작품은 명확한 해석을 요구하기보다, 관객 각자의 경험과 감정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관객마다 다른 ‘해석의 여정’을 걷게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 관객들과 진정한 교류를 나누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단순히 무대를 바라보는 일방향적 관람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시간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이 작품이 서로 다른 문화와 감정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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