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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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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2025년 9월 16일부터 11월 16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공연된다. 미국 극작가 데이브 핸슨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연극계의 고전이 되어버린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프로그램북의 언어를 빌리자면) ‘오마주’하고 ‘패러디’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2024년 제작사 파크 컴퍼니와 오경택 연출의 협업을 통해 라이선스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에스터 역할을 맡은 이순재 배우의 건강 상 이유로 후반부 회차가 취소되었던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고, 1년이라는 짧은 텀을 거쳐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가 되었던 관객들에게 재연 소식을 알렸다.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에 기반한 신선한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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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고도를 기다리며> 속에서 ‘고도’(Godot)의 의미는 신(God)이 될 수도 있고, 본질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여백으로 남은 가치이다.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려도 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허무함, 그리고 이를 반복해야만 하는 삶의 모순은 가치가 사라진 시대, ‘신’이 사라진 시대, 확신이 없었던 근대 사회에서 등장한 ‘부조리극’이라는 형식을 반영한다. 이러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패러디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고도’를 기다리는 두 캐릭터의 언더스터디인 두 배우들의 이야기로, 주인공인 에스터와 밸은 마치 원작 속 캐릭터가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연극에 설 기회, 연출이 자신들의 연기를 보러 찾아올 기회를 기다린다. 이러한 배우의 삶은 어느새 불확실한 삶을 견디며 자신만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인류 전체에 대한 은유로 읽히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원작을 ‘오마주’하며 유쾌하게 ‘패러디’하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속 에스트라공(고고)의 언더스터디인 에스터, 블라디미르(디디)의 언더스터디인 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들이 대기하는 장소인 ‘제 2 대기실’이 이 연극의 공간이 된다. 사라진 소품인 에스트라공의 신발(후에 에스터가 이를 훔쳐 신고 있음이 언급된다)을 찾으러 왔던 무대 조감독 로라는 그들에게 ‘연출님’이 오지 않는다고 전하러 오며, 이는 원작 속에서 ‘고도’가 오지 않고 있음을 전하는 소년의 역할과 같다. ‘고도’의 의미 역시 프로그램북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듯 밸과 에스터를 보러 오지 않는 연출의 역할과 같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대를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고도’의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럭키와 포조의 존재 역시 원작에서는 중요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서는 에스터와 에스트라공, 밸과 블라디미르의 연결이라는 두 인물 위주로 각색되어 이 둘을 ‘상징하는’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밸이 화장실을 차지한 에스터 때문에 로비 화장실을 사용하다 소속사를 얻게 된 일에서 원작 속 디디의 ‘오줌’이 연상되도록 구성되었다는 점, 맞지 않는 에스트라공의 구두라는 원작 속 설정이 에스트라공의 구두를 몰래 신은 에스터가 자신의 발에는 신발이 작아서 지속적으로 고쳐 신는다는 점 등이 원작과의 연결고리다.

 

또한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 외에도 연극의 역사에 걸작으로 남은 셰익스피어의 『멕베스』와 『햄릿』을 포함한 희곡들,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다양한 작품에 대한 언급과, 체계화된 연기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줄리어드 대학의 연기 전공 등 연극과 관련된 요소들이 등장하며 서사의 유기적 구성에 기여하기에,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특정한 연극은 어느새 연극사의 맥락과 상호 연계되며 작품 내에서 보편적인 의미의 ‘연극’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The show must go on’, 무대에서는 절대 의심되지 않는 대전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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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결말은 끝내 바라던 무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작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와 유사하지만, 그와는 차별화된다.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배우의 애환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된 에스터와 밸에게 로라가 다시 찾아와 ‘비상 상황’으로 퇴근해야 한다고 알리면서다. 에스터와 밸은 주연 배우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오인하고 자신들이 배역을 맡으면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로라가 가져온 소식은 뜻밖의 소식이었다. 바로 늘 밸이 연극에 데뷔하는 것을 보기 위해 매일 극장에 오시던 메리 이모가 객석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이는 그 이전 밸과 에스터의 대화 장면에서 메리 이모가 나이가 많고 몸이 불편하시다는 것을 언급한 밸의 대사가 복선이 된다. 로라는 에스터와 밸에게 퇴근을 권하지만, 밸은 메리 이모가 원했던 ‘공연’을 바로 이 대기실에서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러한 밸의 결심을 실현하기 위해, 에스터와 밸은 지금 이 대기실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 시작하며 막을 내린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 속에서 오늘도 오지 않는 고도에 지쳤지만 늘상 그렇듯 ‘가자’를 반복하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마지막 모습처럼.

 

흥미로운 것은 이 결말이 가지는 역설적인 측면이다. 에스터와 밸이 둘만의 연극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한 ‘희곡’과 달리) ‘관객’이 포함된 연극의 4요소에 비추어 봤을 때 ‘무의미한’ 행동이다. 관객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의 연기의 결과물인 연극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연극은 아니지만, 그들은 ‘공연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끊겨버린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한다. 밸과 에스터가 연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제된 관객도, 그리고 밸을 기다리던 메리 이모도 없기에 연극이지만 연극이 아닌 역설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공연 중간에 언급되는 “구두쇠의 연기법”을 두 명이서 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동어반복이 되는 것처럼, 공연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명제 역시 동어반복과 유사한 것이 되어버린다. 공연은 내적인 불충분성에도 불구하고 자기충족성과 자기완결성을 지닌 무언가로 묘사되고,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연극(<고도를 기다리며>)의 위치는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 속 ‘고도’라는 미지의 존재처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를 부여받는다.

 

당장 얼마 전까지 공연되고 있었던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비평에도 언급했던, 삶을 연극 무대로 은유하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연극계에서 담론화되는 방식처럼, 작품 중에 언급되는 영화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There's 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의 (한국어로 번역되며 의역된) 제목이 주는 메시지는 곧 이 작품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명제 ‘the show must go on’은 공연을 삶이라는 층위와 비견될 만큼 절대적 가치로 의미화하며, 그렇기에 공연을 수행하는 이들의 자기 재현에 있어서의 나르시시즘에 복무하기도 한다. 과연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위계와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지속되어야 한다’라는 명제 속에는 아무런 오류와 빈틈, 반례가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이 작품은 연극을 낭만화하는 창작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무대 예찬’일수도, 아니면 ‘관객 없는 공연’을 수행하는 두 배우의 모습으로 끝맺는 결말을 통해 전제 자체의 모순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맥락 속에 배치된 메타적인 자조일수도 있다. 사실, 당연하게도 그 둘은 한 무대 위에서 공존하는 가치일 수도 있다. 또한 어찌보면 이렇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 것이 어느새 하나의 원형이자 전형이 되어버린 고전에 대한 패러디의 묘미다. 원작이 모순, 역설의 언어를 삶의 허무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했던 것처럼, 원작을 오마주하면서 패러디하는 이 연극 역시 모순과 역설의 언어를 경유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만, 다소 ‘희비극’(tragicomic)적인 방향으로, 공연과 삶 모두에 착종되어 있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말이다.

 

 

 

초연부터 재연까지, 무엇이 달라졌고 어떻게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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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2024년 초연은 고정 페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곽동연 에스터와 박정복 밸은 100분의 러닝타임을, 이순재 에스터와 카이, 최민호 밸은 90분의 러닝타임으로 대본 자체가 유동적으로 구성되었다. 곽동연 에스터와 박정복 밸 페어는 실제 아역배우 출신인 곽동연 배우의 나이와 상황을 고려하여, 데뷔한 지 오래된 선배이지만 실제 나이는 더 적은 에스터와 사회생활을 하다 늦게 연극에 입문한 박정복 밸이라는 조합으로 후반부에 밸이 나이를 속였다는 추가 설정이 밝혀진다. 반면 이순재 에스터와 카이 밸, 최민호 밸은 실제 배우의 나이차이를 반영하여 오래 연극계에 몸담은 대선배 에스터와 신참 배우 밸이라는 관계성을 기반으로 대본이 구성되었다. 이러한 초연과 달리, 재연은 에스터(박근형, 김병철)의 나이가 밸(이상윤, 최민호)보다 많다는 것을 전제하는 버전으로 통일되었다. 또한 재연에서는 무대 조감독 로라(김가영, 신혜옥)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상사(‘무대 감독’으로 추정)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가 잠시 언급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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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초연에서는 공연장 내부 로비 캐스팅보드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역할을 맡은 신구와 박근형 배우의 사진이 위에 배치되어 있고, ‘Today’s Understudy’에 에스터와 밸의 이름과 맡은 배우의 사진이 그 밑에 더 크게 배치되어 작품의 컨셉에 충실했다면, 재연에는 블라디미르 역할을 맡았던 박근형 배우가 에스터로 참여했기에 일반적인 캐스팅보드의 형식을 하고 있다. 또한 초연에는 공연 중간 서사의 진행을 위해 같은 제작사인 파크컴퍼니의 공연인 <고도를 기다리며>(신구, 박근형 페어)의 공연 녹음본이 삽입되기도 했다면, 박근형 배우가 참여한 재연에는 그러한 연출이 수정되었고 청각적 요소 대신 무대 ‘위’와 아래 대기실을 대비시키는 조명을 더욱 활용해 <고도를 기다리며>가 대기실 위 공간에서 공연중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출적인 차이는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와 그 상황의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반영되는 것이며, ‘메타 코미디’ 작품이라는 이 연극의 특성에 부합한다.

 

초연에 존재했던 연하 선배 에스터와 연상 후배 밸로 구성된 페어와, 일반적인 선후배의 나이차이를 반영한 다른 페어는 러닝타임도 다르지만, 배우의 나이 변화에서 줄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역시 존재한다. 전자(초연의 곽동연-박정복 페어)의 경우 나이를 속였다는 설정에서 주는 아이러니, 그동안 밸이 자신의 커피에 오줌을 타 왔다고 분노하는 에스터의 발언의 진실성, 감정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격렬한 몸싸움이 작품의 재미 포인트가 된다면, 후자의 경우는 무대에서의 삶은 물론 인생 역시 오래 산 대선배와 경력과 경험 모두 짧은 신입이라는 관계와 밸을 ‘몰아가는’ 에스터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명시적인 나이 차이와는 상관없는 ‘유치해진’ 갈등과, 그러한 다툼의 과정에서 내세우는 근거의 진위성 자체가 의문에 부쳐지면서 개그 포인트가 된다. 에스터와 밸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하기 시작한 결말 역시 초연 곽동연-박정복 페어의 경우 진지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다 각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로서의 연기가 시작했음을 알리는 듯이 유쾌하고 친근한 느낌의 톤으로 '대사 속 대사'를 시작하며 막이 내렸다면, 재연의 경우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속에서 결의에 찬 상태로 진지하게 임하는 '신입' 밸과 그에 맞춰 주는 '베테랑' 에스터의 모습으로 막이 내린다. 초연을 본 관객이라면, 두 버전의 미세한 차이를 비교하면서 감상하는 것도 1년만에 다시 돌아온 이 연극을 더욱 깊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참고자료: 2025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프로그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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