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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아서 야외에 여유롭게 머물 수 있는 가을은 페스티벌을 열기에 맞춤한 계절이다.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숲 공원에서는 ‘서울숲 재즈 페스티벌’이 열렸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지인과 함께 20일 토요일 서울숲 재즈 페스티벌을 즐기러 갔다. 이번 글은 그날의 희비애락이 담긴 일기 겸 후기이다.


예약해 둔 소풍 용품을 챙겨 페스티벌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뮤지컬 <에비타> 출연 배우들이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전날 비가 온 여파로 흙이 젖어 있었다. 돗자리를 깔고 짐을 푸는 동안 금세 바지 밑단과 운동화에 흙물, 풀물이 들었다. 야외 활동에 새 신발을 신고 온 것을 자책하느라 시무룩해진 나를 동행이 FnB존으로 끌고 갔다. 경품을 타기 위한 여러 소소한 이벤트에 참여하다보니 가라앉았던 기분도 차츰 나아졌다. 부스 앞에 줄을 서 있는 동안 메인 무대 외에 설치된 다른 무대에서 들려오는 밴드 ‘더 사운드 오브 얀씨 클럽’의 사운드가 흥미로워 기분 전환이 더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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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아 퀸텟’ 연주부터 제대로 자리 잡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트럼페터를 주축으로 구성된 퀸텟이어서 그런지 두 번째 연주곡의 트럼펫이 호방하니 좋았다. 재즈는 항상 도입부가 좋은 것 같다. 네 번째 곡은 잘 노는 신사의 경쾌한 걸음걸이가 떠오르는 곡이었다. 이 곡에 주인공이 있다면, 그는 눈치 보고 있는 누군가에게 ‘가슴 펴고 턱 들고 걸어!’라고 말하고는 신나게 놀러가는 모습으로 그 말을 직접 실천해 보여주는 듯 하다. 그 다음 곡에서는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가 주축이 되어 앞 곡들에 비해 차분한 정조를 전해주었다.


가을이긴 하지만 오후 두 시에 탁 트인 곳에 앉아있자니 아직 더웠다. 양산과 모자와 선글라스로 햇빛을 차단하며 생각했다. 그랑자트 섬의 오후에 소풍 나왔던 사람들도 사실 여러 물건들을 챙겨 오느라 손이 무겁진 않았을지.


스텔라 장이 무대에 있던 3시 중반 쯤 되어서야 유유자적한 소풍 느낌이 물씬 났다. 햇빛도 두 시보다는 약해지고 바람도 솔솔 불어왔기 때문이다. 스텔라 장 파트에는 대부분 숲과 어울리는 곡들이 많았다. 인상 깊었던 곡은 비 오는 날 날씨를 좋다고 말하는 프랑스어 노래와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라는 노래였다. 전자는 가족 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후자는 가사에 덜 공감하고 싶어도 가사가 너무 와닿아서였다.


메인 무대 외의 공연들도 궁금해하다 서브 무대 중 하나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의 음악은 ‘동네 숨겨진 맛집 같은 느낌’이라 소개한 ‘비츠냅’이 공연 중이었다. <잠복 근무>는 형사들의 추격 장면을 떠올리며 쓴 곡이어서 느와르한 느낌이 가득했다. 나보다 음악을 잘 듣는 지인 말로는 베이스 연주가 미쳤다고. 후반부 연주는 내가 들어도 긍정의 ‘미쳤다’ 소리가 나왔다. 관객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 팀의 유명한 곡인 듯한 <낮술은 즐거워>는 앞의 느와르함과 달리 풍부하게 풀어진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실 제목부터 페스티벌에 어울렸다. 페스티벌 구역 안에는 맥주 캐리어나 반쯤 찬 와인잔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리듬 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자유로움과 즐거움이 엿보였다. 이 사람들도 평일이면 출근하느라 바쁘겠지. 하지만 지금은 자유롭고. 이상한 동질감이 들었다.


동행과 같이 메인 무대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라이온킹>의 상징적인 오프닝 곡이 강렬하게 울려퍼졌다. 메인 무대 전광판에 ‘심바 캠’ 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계 카메라는 어린 아기와 반려견들을 찾아 비추었고 사람들은 자기 아이나 강아지들을 높이 들어올려 보였다. 동네(?) 사람들, 내 새끼도 이렇게 귀여워요. 멀리서 군데군데 들어올려진 귀여운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전광판에 비친 한 아버지가 자식 자랑을 신나서 하는데 그 모습에 왠지 뭉클해졌다. 체력적으로 지쳐가는 때에 웃음으로 환기가 되며 관중이 에너지를 얻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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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슬슬 저물 준비를 했다. 메인 무대의 다음 주자는 해외 뮤지션인 ‘Aaron Parks Little Big’이었다. 첫 곡부터 전주가 쏙쏙 들어온다 싶었는데 곧이어 내 취향은 이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계속 ‘뭐야, 진짜 내 취향이잖아’ 라던가 ‘이 곡도 저 곡도 내 취향이잖아!’ 라며 감탄했다. 연주의 질감이 차가운가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 매끈한데 선율의 한 꺼풀 아래에는 심란함이 깔려 있는 것이 좋았다. 거기다 그 심란함의 코드가 내가 가진 심란함과 잘 맞았다. 취향에 딱 맞는 밴드를 발견하게 되어 행복했다. 연주에 심취한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행복해 보였다. 한국인 드러머의 드럼 연주도 멋있었다.


이 밴드의 음악에 깔린 심란함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곧 날씨 때문에 정말로 심란해졌다. 동행이 저녁거리로 시킨 배달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비가 오기 시작했다. 밴드는 계속 열심히 연주 중, 사람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나가고 있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동행이 오길 기다렸다. 음식을 챙겨 온 동행은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아, 억까야, 진짜.”


햇볕 뜨거운 낮까지는 양산이었던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음식이 비에 젖지 않게 가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바삐 음식을 떠먹었다. 비가 계속 쏟아진다면 지금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얘기하면서 우선 저녁을 되는대로 빨리 먹기로 했다. 밥을 급히 먹고 나니 비가 다시 잦아드는 듯도 하고, 그럼 계속 있을까 싶어지면 다시 빗방울이 굵어졌다. 사람 농락하네. 서브 무대에서부터 뮤지션 ‘피달소’가 재즈로 편곡한 <섬집아기> 노래가 흘러들었다. 비 오는 날과 어울리는 노래였다. 그런데 비 맞으면서 거취를 고민하는 채로 이 가련한 노래를 듣고 있으니 살짝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빗발이 약해지고 굵어짐을 반복함에 따라 들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다른 이들도 우리처럼 난처함에 도리어 우스운 마음이 생겼던 걸까. 피달소 노래가 좋아서 떠나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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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돗자리까지 다 접었다가 비가 잦아드는 걸 보고 다시 돗자리를 펴고 등받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지금까지 버텼는데 기왕이면 마지막 순서까지 다 듣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빗속에서 떠나지 않고 버틴 것을 보니 왠지 마지막 팀의 음악이 좋을 것 같았다.

 

이윽고 마지막 팀인 '마이크 스턴 밴드'가 나왔다. 중년과 노년 연주자들이 있는 팀이었다. 그들이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한 순간 우리 얼굴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와, 세상에. 연주가 너무 좋았다. 앞에 나온 여러 팀의 음악도 좋았는데 이 팀은 관록과 여유가 달랐다. 이 밴드만 소리가 두 배로 풍부해지는 버프가 걸린 악기라도 쓴다는 말인가? 한 가지 업을 백발이 될 때까지 하면 이렇게 잘할 수 있는 걸까? 정말 멋있다. 나도 내 일에서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되고 싶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도 줄어들기 때문에 즐기려고 온 페스티벌에서 이런 마음이 들게 되어 뜻깊었다. 와, 아니 근데, 진짜 너무 잘해. 곡이 너무 좋아. 시종일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연주를 감상했던 것 같다. 동행과 아까 퇴장했으면 서운할 뻔했다고 얘기하며 마지막 곡까지 기분 좋게 감상했다.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누웠을 때, 재즈의 파란 선율이 귓가에서 물결치고 내 귀를 휘감았다. 하늘 좋고 공기 좋은 데서 하루종일 재즈 음악에 빠져 있는 거, 재밌는 거였네. 집에서 듣던 재즈는 부드러운 갈색이 많았는데 오늘 하루 끝에 이른 재즈는 생생한 파랑이었다. 자기 전 귓가에 음악이 쟁쟁한 것이 입면에 방해가 되지 않아 신기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그런 고로, 이번 페스티벌 경험의 총평은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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