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특히 삶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우리는 명쾌한 처방을 바란다. 다만 이런 소망은 때로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 예로, 자신을 포함한 특정 인물이나 한 집단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결론짓는 행동은 극단적인 사고를 불러올 공산이 있다. 이러한 진단은 문제를 쉽게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문제를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원인을 답으로 가정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답이라는 확신이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왜곡하거나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려진 진실이 있다고 믿고 진실이라 믿는 것을 손에 꽉 쥔 모습은, 바깥에서 보면 아주 아둔하고 위험한 바보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고 진영을 나누어 깊게 갈등하는 현재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극단적인 논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시점에서 『깊이에의 강요』를 읽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온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삶의 파편과 인간의 모순에 집중한 네 편의 이야기를 나누며, 독자로 하여금 진실을 새롭게 구성하는 인간의 관점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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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고유성이 아닌 관점의 다면성을 믿는 일


 

『깊이에의 강요』에는 「깊이에의 강요」, 「승부 」,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 」, 「문학의 건망증」 총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작가는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던지는 질문을 독자의 뇌리에 새긴다. 이 중 특히 「깊이에의 강요」 와 「문학의 건망증」은 우리 인식의 불완전함과 끊임없이 자신 나름의 답을 탐색하는 행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단편집의 첫 이야기 「깊이에의 강요」는 한 젊은 여성 화가가 평론가가 던진 "깊이가 없다"는 평을 듣고 실의에 빠져 생을 마감하며, 평론가가 그의 죽음 이후 자신의 평을 뒤집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무척 짧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화가의 작품 인생과 그 자신의 삶마저 끝내버린 '깊이'라는 것이 몹시 모호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사실 여인은 소묘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화가다.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기법 자체에 그녀 자신의 시선과 인생이 녹아 있는 것이다. '깊이'라는 말이 그녀의 작품 뿐만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것은 이러한 소묘라는 예술의 본질과 그의 인생이 깊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깊이는 굉장히 신중하게 고심한 후 조심스럽게 사용했어야 하는 단어였을 테지만, 젊은 화가의 사후 나온 평론가의 단평은 이 단어의 의미와 힘을 잃게 한다.

 

["(생략)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14p

 

한 사람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듯했던 평가도 결국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야기의 끝에 남는 것은 화가의 작품에 정녕 깊이라는 것이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다.


「깊이에의 강요」에서는 3인칭의 시점에서 한 예술가가 평론가의 알맹이 없는 비판에 사로잡혀 생을 마감한 비극을 외부의 목소리로 서술한다면, 「문학의 건망증」은 1인칭의 시점에서 문학의 건망증을 겪는 당사자가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전하려 노력한다. 쥐스킨트는 「깊이에의 강요」, 「승부 」,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 」에서 예술가와 현대인의 삶을 관찰하며 자신의 견해를 전하지만,  「문학의 건망증」은 작가이자 독자로서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는 듯하다.

 

질문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시작되는 그의 말은 소설이 끝나기 전까지 내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말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앞서 했던 말을 잊으며 전개된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독자는 처음부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세 번이나 읽은 괴테의 책도 그는 한 줄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토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을 잊을 수밖에 없고 잊기 때문에 문학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없는가? 쥐스킨트는 이 문학의 건망증의 원인을 위안과 같이 건네며 이에 반박한다.


["(생략)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75p~76p

 

살면서 독서의 힘을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때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스킨트는 분명히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는 독서를 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아쉬움이나 회의적인 심정에 독자의 입장에서 공감하다, 문학을 읽는 것에 분명한 의미가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전한다.

 

계속해서 다양한 세계를 접하고, 그것을 흡수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는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꾸준히 내면을 가꾸어가고 자신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 독서로 자신을 바꾸려는 행위를 그는 높게 산다. 「문학의 건망증」은 그러므로 이러한 사유의 힘을 기를 수 있는 독서의 힘을 역설하고, 독서의 의미를 우리 스스로 찾아가기를 바라는 쥐스킨트의 목소리를 전하는 듯하다.

 

『깊이에의 강요』는 이렇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쥐스킨트의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의 끝으로 쓰인 글로 채워져 있다. 그가 그리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때로는 지극히 이기적이지만, 그러한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희망이 작게나마 깃들어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면 불완전한 존재라는 전제에서 우리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해, 우리 존재가 끝없는 확인과 자기 반성으로 계속 변화하며 나아간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최근 접한 김초엽 작가의 인터뷰에서 잊을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다. 그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결국 인간의 고유성이며, 1인칭의 몸으로 평생 자신의 한계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곧 인간이라고 말했다. 우리 자신의 영원히 보완될 수 없는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진실의 고유성이 아닌 관점의 다면성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도 양극단의 사고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나름의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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