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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클럽>은 시간이 지난 이후의 우리에게 침묵과 불안함을 조명하며, 젊음에 대한 허상을 드러냈다면, <해피엔드>는 보다 구체적으로 동시대의 사회적 결합을 연결한다. 소마이 신지가 활동하던 1980년대는 고도성장이 끝나고, 공동체가 해체되던 시기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이 무너진 ‘상실의 시대’였지만, 소마이 신지는 <태풍클럽> 내에서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거시적 맥락의 통증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피엔드>의 네오 소라는 유발되는 재난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따금 울리는 지진 경보 속에서 아이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흩어진다. 구름에 비친 글자들은 사회의 불안을 강조하고, 코우가 참여하는 시위들은 영화 내 사회의 불안감을 표현한다. 기술의 발전과 폭력성의 위협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지금, <해피엔드>는 사회의 고통을 <태풍클럽>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네오 소라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생각을 나눌 동료를 만드는 과정을 코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코우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꾸준히 정체성을 의심받는다. 코우의 위치는 일본 사회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들은 일본 사회 내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음에도 내부로 편입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서 배회한다. 코우와 친구들이 한밤에 클럽에 몰래 들어가거나, 경찰의 단속을 피해서 도망갈 때마다 이들의 위치는 사회 내가 아니라, 경계선에 머문다. 다만 코우의 반대편에는 소꿉친구인 유타가 서 있다. 코우는 경찰의 단속을 피하려 하지만, 유타는 디제잉 플로어 앞에서 음악을 즐긴다. 같은 공간 내에서 오랫동안 같이 지냈지만, 서로 다른 위치, 코우는 재일 한국인, 유타는 순수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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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의 카메라는 사회 내의 주변화된 존재임을 표현하기 위해, 일관된 거리를 유지한다. 거리의 위치는 바깥쪽에 머물며, 클로즈업이나 롱 샷은 자제되어 있으며, 인물이 끼어드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풀샷을 유지한다. 학교 동아리방으로 도망친 친구들은 새벽까지 함께 한다. 깨어 있는 코우와 유타는 교장이 주차한 노란색 스포츠카를 내려보고, 짓궂은 장난을 저지른다. 자동차를 세워 놓는 것이다. 이후 교장은 코우와 유타를 압박한다. 이때도 시선은 지극히 정적이다. 인물은 외화면에서 끼어들며, 재난이 닥칠 때가 되어야 위치를 바꾸기 시작한다. 코우의 신념 확립에 도움을 주는 친구 후미가 외화면에서 끼어드는 순간에도, 유타가 장난에 대해서 말할 때도, 지진 경보가 울리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해피엔드> 내에서 인물을 비추는 카메라가 영상을 구성한다면, 영화 내 상징물로 활용하는 CCTV는 인물을 통제하는 사회 구조를 드러낸다. 교장은 자신의 차에 테러가 일어났다고 장담한 채, ‘Panopty’에게 학교의 보안을 맡긴다. 학교 곳곳에 설치된 CCTV는 아이들을 감시하고, 학교 외면에 놓인 스크린은 아이들의 벌점을 실시간으로 채점한다. 학교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는 외부의 위치에 놓여 있으나,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상징처럼 자리 잡는다.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Panopticon), 즉 아이들을 감시하고, 감시자의 존재 없이 행동을 일정하게 통제하는 권력 구조를 재현한다. 계단에 숨어서 사랑을 나누는 학생들을 적발하고, 지정된 교복이 아니라고 벌점을 매긴다. 이를 확장하여, 통제하는 현실은 영화 내 사회도 마찬가지며, 이들은 모두 ‘안전’이라는 지극히 온정주의적인 이유를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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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와 후미가 시위에 나서는 것도, CCTV를 없애기 위해서 교장실에서 농성하는 이유는 ‘안전’이라는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자유를 위해 반항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반대편에는 소꿉친구 유타가 있다. 경계선에 서본 적은 없지만, 경계선을 바라보는 유타는 자신의 장난을 폭로하면서 경계선 위에 서게 된다. 코우와 후미는 정치적 신념을 나눈 동료인 반면, 유타는 그렇지 않다. 파놉티콘의 통제가 심해진 이후, 동아리방은 폐쇄된 채 물건을 모두 압수당한다. 서브 우퍼를 새로운 아지트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코우와 유타는 대립한다. 사회의 불합리를 지켜보지 못하는 코우와 순응하는 유타의 관계는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친구라는 모호한 관계에 파열이 생기고, 유타는 멀어져 가는 친구들을 바라볼 뿐이다. 유타는 끝내 타자의 불투명성을 넘지 못한 채, 비대칭적으로 남아있게 된다.

 

사회 안에 존재한다고 해서, 타인과의 관계는 자연스레 이뤄지지 않는다. 멀어지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유타의 모습은 언제나 바깥에 서 있다. 멀어져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유타의 모습은 지켜보기만 할 뿐, 내부로 진입하지는 못한다. 밍과 아타가 동아리방에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때, 유타는 동아리방 문의 창문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코우가 유타가 마주하는 순간조차,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코우에게 유타는 이미 과거형의 관계일 뿐이며, 다른 친구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어도 유타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다. 이는 <태풍클럽>에서 미카미가 사유 끝에 자멸한다면, <해피엔드>의 유타 또한 ‘과거에서 멈춘 자’로써 표현된다.

 

마침내 유타의 성장이 시작되었을 때, <해피엔드>는 유타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다. 졸업식 직전, 교장은 파놉티콘의 폐지를 위한 조건으로 자신의 차량에 장난을 친 범인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통제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파놉티콘 폐지를 원하는 아이들과 충돌한다. 혼란한 강당 속에서 유타는 연단 위로 올라선다. 코우가 유타를 찾아보지만, 이미 유타는 연단에 올라서서 혼자한 짓이라고 고백한다. 단순히 남을 위한 희생이라고 보기엔, 유타의 고백은 성장을 위한 선택에 가깝다. 방치되지 않기 위한 발악은 학교라는 체계에서 쫓겨났지만, 자아를 주도하게 만든다. <해피엔드>는 유타의 고백을 통해 청춘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다. 관계의 가능성, 다가가기 위한 망설임, 맥락에서 벗어난 방황은 카메라에 의하여 정교하게 포착된다. 관객은 영화가 본질에 다가갈수록 청춘의 기억, 말하지 못한 감정의 시간을 부활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코우와 유타는 육교 위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둘은 잠시 멈춰 서고, 유타는 코우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때 영화의 프레임은 완전히 정지한다. 흐르던 시간이 정지된 순간, 유타는 코우를 향해 손을 내민다. 프리즈 프레임 이전에도 이 둘의 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은 관객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멈춘 순간, 이들의 관계성에는 여운이 남는다. 벤야민이 말하듯, 진정한 인간의 만남은,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방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네오 소라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에게 관계의 이후를 맡겼다. 이제 의미를 만나는 주체는 없어졌다. 영화 바깥에 있는 관객만이 남았다. <해피엔드>의 청춘은 유보된 인간을 넘어서서, 어떻게 방황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 헤맨다. 젊음이란 무엇인가란 답을 찾아 헤매며, 영화는 끝내 말하지 못하는 잔해를 마주하게 만든다. 관객의 기억이 겹치는 순간, 영화는 다가갈 수 없게 된 관계와 완결되지 않는 사람들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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