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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일, 대전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에서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이 개최되었다. 본 공연은 오후 7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예술의 전당은 2시간 전부터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몇 시간 후면 그의 연주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뜬 수많은 인파가 구름 같은 무리를 형성했다. 친필 사인 CD와 포토 존을 위해 기약 없는 기다림을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냥 밝기만 했다. 대전에서 조성진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는 기쁨은 예술의 전당을 가득 메웠고, 그 행복감에 전염되어 나 또한 웃음이 저절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클래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피아니스트 조성진. 그는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의 우승을 계기로 클래식계의 스타덤에 오른다. 1994년생으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지만,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곡까지 넓은 레퍼토리와 섬세하고도 완벽한 테크닉, 미스터치가 거의 없는 완벽함으로 끝없는 잠재력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널리 날린다.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모리스 라벨의 곡들을 통해 한국의 팬들에게 다가서는 조성진은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도 클래식 애호가들과 만나며 조성진만의 음악 세계로 초대한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로 그의 음악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눈앞에서 연주를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과거에 녹음되어 몇 번의 변환을 거친 음원과 무대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며 연주자와 관객이 주고받는 음악적인 교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대전에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클래식계의 아이돌이라고 불릴 만큼 인기가 많다 보니 티켓팅은 듣던 대로 쉽지 않았고, 몇 번의 아쉬운 실패도 거듭했다. 그럼에도 운이 좋게 공연장 사이드 쪽의 좌석 하나를 간신히 예매할 수 있었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라벨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공연 당일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겨났다. 마치 휴가를 맞아 여행을 가기 전 일련의 날들이 행복하기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예술의 전당에는 비교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성진이 대전에 오기만을 기다려왔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과 마주하며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클래식을 즐기는 소비층 가운데 2030 여성이 대다수였다는 점이다. 옷차림도, 헤어스타일도, 직업도 나이도 모두 달랐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분명한 사실은 젊은 여성들로부터 클래식이 사랑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성진의 어느 인터뷰 중,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클래식 공연을 감상하는 한국의 관객층이 훨씬 젊다는 특징을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직접 체감하니 감상이 새로웠다.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클래식을 감상하러 온 여성들이라니. 특히나 다가서기 어려운 고급 예술이라고만 여겨온 클래식의 대중화를 실제로 목격한 것처럼 느껴져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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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무대의 불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캄캄해진 무대에 피아노를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곧이어 조성진이 등장했다. 단정한 걸음걸이로 관객들에게 인사를 마친 그는 짧은 준비를 끝내고 바로 연주에 몰입했다. 대전 예술의 전당은 소리의 울림이 작아 다른 연주 홀보다도 귀 기울여 들어야 했다. 적막 속에서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라벨의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 M.5”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나에게 있어 타악기라는 인식이 강했다. 건반을 누르는 힘과 비례하여 해머가 현을 건드리고, 그 소리가 음으로 이어져 선율로 표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연주된 음악은 단순한 음들의 연결로만 이루어진다고 여겨왔는데, 아무래도 나의 견식이 짧았나 보다.

 

찰나를 차지하는 멜로디는 완전한 음악으로 이어졌고, 귀를 통해 들어온 높낮이의 변화는 뇌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드럽고 유연하게 이미지로 이어졌다. 곡마다 연상되는 장면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라벨의 작품답게 곡은 단순한 음악에서 그치지 않았고, 빛에서 나아가 색채로, 풍경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조성진의 연주는 아주 야트막한 계곡에서 돌과 돌 사이를 지나 흐르는 물길로, 수련 봉우리가 떠 있는 연못에서 잔잔한 파동으로, 소나기가 무척 심해져 모든 것이 떠내려갈 것만 같은 녹색의 호수가 되었다.

 

조성진의 피아노 리사이틀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곡은 “물의 유희”와 “바다 위의 작은 배”였다. 그 중 “물의 유희”는 선율로부터 느껴지는 색채감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 물의 유희라는 곡명처럼 물의 움직임을 유려하게 담아낸 작품에 대해 조성진은 섬세하게 건반을 매만지며 물방울이 조잘스럽게 튕겨 나가는 장면을 아름답게 빚어냈다. 같은 음이지만 표현되는 방식에 따라 음색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가장 잘 와닿는 작품이었다.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울창한 숲을 보았을 때 같은 초록색이라고 하더라도 나무마다 조금씩 다른 색으로 빛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심상의 구체화는 “바다 위의 작은 배”를 감상할 때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투명하고 가는 유리알로 이루어진 샹들리에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듯한 연주는 곧이어 조밀한 수면의 파동으로 변했다. 그가 표현하는 “바다 위의 작은 배”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바다라기보다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연못이었는데, 지면과 맞닿아 물이 스며드는 뭍의 경계에서 물결은 연속해서 부딪히고 깨져갔다. 그중 일부는 반작용으로 다시 연못의 중심으로 되돌아가고자 반사되었고, 눈앞에 이미지를 그려내는 그의 화려한 테크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고, 시간의 흐름을 느낄 새도 없이 공연이 마무리됐다. 정신을 차려보니 9시 반을 훌쩍 넘어가는 시각이었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귀가하려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예술의 전당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직접 조성진의 연주를 들었다는 벅차오름과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몽롱한 상태로 비척비척 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보니 맑게 갠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박혀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자, 올해 들어 처음 듣는 매미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반복해서 울리는 진동이 매미 울음인 줄도 모르고 걸음을 재촉하기만 했던 게 마음에 걸려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췄다. 평화롭고도 고요했던 그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름이 왔음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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