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사의 상징과도 같은 국립극단이 창작 신작 <삼매경>을 관객 앞에 내놓았다. 명동예술극장을 무대로 하는 이번 작품은 1939년 발표된 함세덕의 <동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극이다. <동승>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 ‘도념’의 이야기를 그린 한국 낭만주의 희곡의 정서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삼매경>은 이 고전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연극 속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물과 배우, 현실과 무대를 교차하여 새로운 시공간을 펼쳐낸다.
이번 작품에서 ‘도념’ 역을 맡은 배우 지춘성은 <동승>와 오랜 인연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1991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동승> 무대에 올라 서울연극제 남우주연상과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인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후에도 ‘영원한 도념’이라는 수식어와 함게 연극계에서 꾸준히 자신의 서사를 쌓아온 그는, 초로의 배우가 되어 다시 ‘도념’으로 무대에 오른다.
연출을 맡은 이철희는 배우 지춘성이라는 존재를 중심축 삼아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배우란 독을 굽는 가마에 자신을 던지는 존재”라며, 극 중 인물이자 배우인 주인공의 고통과 구원을 통해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다. 배우가 직업적으로 감내해야 할 ‘소멸과 투신의 반복’을 통해 결국은 관객이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로 나아가도록 한다.
<삼매경>은 몰입을 서사의 중심에 둔 작품이다. 배우가 연극 속에서 과거의 실패와 욕망에 사로잡혀 극 중 극을 연기하다가, 현실과 허구의 구분이 무너지는 경지를 그려낸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에 또 하나의 극장을 세운 복합적 공간 구성은 관객에게 특별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창작진 역시 무대, 조명, 음향, 의상 등 각 분야의 정점을 이룬 예술가들로 구성되어, 현실과 허구가 맞닿는 지점을 한층 세밀하게 구현한다.
몰입, 무아지경, 그리고 청산유수
극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무대 위에는 자연이 펼쳐져 있다. 배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와 같은 자연의 감각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유롭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지만, 나름대로 배우들이 목과 몸을 푸는 시간이리라 생각했다. 공연 시작 5분 전쯤이면 자연스레 상∙하수로 흩어지리라 짐작했지만, 극은 어수선한 듯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시작되었다.
막이 오른 후, 극은 ‘지나치게’ 평화롭다. 자신을 자신의 역에 가둬버린 한 배우의 내면이 이토록 평온할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도념과 마주 앉은 ‘어린 도념’은 때론 손녀 같고, 그보다는 친구 같기도 하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 더 정확하게는 무슨 일이 생겨야만 할 것 같은 울렁임이 객석을 맴돈다. 돌고 도는 대화 끝에 도념은 자신의 한계를 고백한다.
‘나는 네가 되지 못한 것 같아.’
그가 원하는 것은 ‘성공한 배우인 나’도 아니고, ‘성공한 배우인 너’도 아니다. 다만 대본 속에 존재하는 ‘도념’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자기를 두고 떠나버린 어미를 그리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도념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흐느껴 울기보다 자신이 점점 더 ‘도념’에게 다가가고 있음에 희열을 느낀다.
현실과 무대의 경계가 더욱 희미해져만 갈 때, 도념은 기존의 시나리오는 내던지고 새롭게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발음 하나, 제스처 하나, 미세한 톤까지도 도념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집착했지만, 이제는 ‘어린 도념’을 차례로 죽임으로써 그를 지워간다. 인물들까지 자아를 지닌 듯 자유롭게 움직이고, 연극은 점차 ‘공동창작’의 경지에 이른다. 말 그대로 무아지경이다.
마치 일인극 방대한 독백량은 압도적이며 흐트러짐이 없다. 숨 쉴 틈이 없는 기백과 기세에 어느새 극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호소력 짙은 그의 외침은 유수와 같은 시간 속에서 청산유수처럼 흐른다.
너에게 묻는다
연출 이철희는 관객에게 묻는다. ‘나는 언제 한 번 이렇게 뜨거워 본 적이 있나.’ 지춘성이라는 배우를 통해 관객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길 바란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안도현의 시가 떠오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자기를 지울수록 존재를 인정받는 배우의 아이러니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 타버린 연탄재의 초라함은 뜨거웠던 순간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도념은 무너져 내리는 무대 앞에서 작별을 고한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아름답다’의 어원은 ‘나답다’라고 한다. 모든 미완성에 붙었던 집착과 집념, 질책과 후회, 연민과 사랑에 말한다. 뜨거웠던 미완성은 나다웠으며, 그래서 아름다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