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대고 도서관에 가 『필경사 바틀비』를 빌렸다. 쌓아뒀던 책들을 제쳐두면서까지 구태여 이 책을 택하였는데, 이러한 고집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허먼 멜빌의 장편 『모비딕』의 임시방편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저히 그 벽돌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동일 작가의 단편으로 그것을 갈음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를테면,
나 : 혹시 ‘스타벅스’의 이름이 『모비딕』에서 유래한 거 아시나요?
A : 아 그래요?
나 : 책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이름이 ‘스타벅’이예요.
A : 아, 그렇군요. 그 책을 읽으셨나 보네요?
나 : 아직 도전하진 못했어요. 대신 『필경사 바틀비』는 읽었어요.
A : 네?
나 : 그 멜빌의 다른 작품 있잖아요.
A : 아, 네.
나 : 그냥 그렇다고요…
이 정도로만 말해두면, 나는 작가 멜빌에 관심이 있고, 또 『모비딕』은 읽진 않았지만, 그 책의 가치는 인지하고 있으며, 대신 그 작가의 다른 작품 정도는 읽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후훗. (실제로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동안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했다. 이 역시 양분되는데, 우선 필경사(the Scrivener)에 대한 정보가 미흡했다. 어감만으로 막연히 ‘필사하는 사람’ 정도로만 알은체해두었고, 거센소리로 시작하는 직업명에 박력을 느낄 뿐이었다. 그 직업이 과거 변호사가 처리해야 할 서류를 정리하는 일을 도맡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실은 관심도 없었다.
또 바틀비(Bartleby)를 한동안(정확히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바틀러’로 오해했다. 아마 동명의 배우나 영화의 영향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마저도 실은 ‘버틀러(Butler)’이니 세 개의 이름에 심심한 사과를 구해야 할 판이었다. 물론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나 싶은 게, 포털에 ‘필경사 바틀러’라고 검색해 보면 한두 개의 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아무쪼록 이렇게 바틀비를 만났다.
1853년 발간된 책인지라 한국에서도 다수의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개중 문학동네를 택했다. 평소 당해 출판사를 애호하기는 하나, 그 영향이라기보다는 그림책인 점에 시선을 끌렸다. 일전에 같은 출판 시리즈의 작품인 고골의 『외투』를 흥미롭게 독서한 기억 또한 한몫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비에르 사발라의 그림은 알맞았다.
『필경사 바틀비』와 같은 책을 만날 때면 심히 곤란해진다. 적은 분량에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도 온갖 해석을 요구하는 그런 책 말이다. 다 읽고서 ‘이게 뭐야’라고 구시렁거리며 한두 가지 생각을 떠올려보다, 그새를 참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찾아봄에도 다시 ‘이게 뭐야’라고 구시렁거리게 되는 책. 끝내 ‘이게 뭐야’로 남는 책. 사실 이런 만남은 처음 느낀 그대로 남겨두어야 온전한 경우가 많다.
실눈으로 각종 의견을 톺아본 결과, 형이상학적이나 신학적 관점이 지배담론이었고 이외 한병철 교수가 앞선 것들을 지적하며 병리학적 관점으로 제기한 글 정도가 흥미로웠다. 그렇긴 하나 그들의 식견을 따라가지 못할뿐더러 처음 바틀비를 만났을 때의 감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틀비는 소설의 화신이다. 그는 소설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소설 그 자체에 가깝다. 그를 툭 건들면 자동응답기처럼 발화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는 소설로서의 인장이다. 부탁해도, 심부름을 시켜도, 심지어는 대화를 시도하려고 해도 그는 시종 같은 말로 갈음한다.
결코 구어적이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문어적이지도 않는 이 말은 곧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까’라는 의문형이 되는 것이다. 그 선택은 일종의 시험대이다. 당혹스러운 그의 말씨에 일부는 책장을 덮어버리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고, 실제로 그러기도 할 테지만, 혹자는 그 말의 착점을 기대하게 된다. 어디까지 그 말을 하는지, 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말(末)은 어디인지. 독자의 머릿속에는 바틀비가 남긴 온갖 점으로 한 점의 점묘화를 만든다.
바틀비를 ‘소설’로 치환한다면, 그를 제외한 인물들은 곧 ‘독자’가 된다. 소설 속 인물은 바틀비와 당위적으로 얽혀있다. 개중 터키, 니퍼스, 너트 등 그를 외면하는 독자가 있나하면, 나(변호사)처럼 그의 결말까지도 바라보는 독자가 있다. 우리가 독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든 책을 완독하지는 않는다. 어떤 책은 마치 작중 인물들이 바틀비의 기행에 학을 떼는 것처럼 도중에 외면해 버리곤 한다. 그러나 일문의 사람들은 견디어내 대단원을 맞이한다.
바틀비는 영원한 미궁이다. 후반부에 그의 과거가 언급되면서 실마리를 푸는 듯하나, 모든 궁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인물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지만, 소설은 끝내 정답을 건네지 않는다. 형상해 낸 작가조차도 그를 내버려둔 것처럼 보인다. 오로지 타인으로 존재하는 그를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완전한 소설도 결국 불완전함을 남길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결국 독자의 해석만이 남는다. 이때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는 데까지고, 그마저도 틀릴 수 있으며 또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있어도 확신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소설을 택하였고, 그 선택으로 바틀비의 최후를 보았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지켜보았다. 도중에 책장을 덮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겠지만, 기어코 닿을 수 있는 데까지는 바틀비를 응시했다. 이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고, 바틀비를 보고, 인간을 마주하는 이유이다. 동시에 인간으로 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