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20250702205259_cbtuzbyd.jpg

 

 

기억이 안 나니? 우리가 널 데려왔잖아.

 

넌 그 일에 결정권이 없었다. 우린 너를 네 죽은 어머니 품에서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짐승을 거두듯 너를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옷을 입히고, 사람들에게 잠깐의 웃음과 즐거움을 주겠다고 네가 활을 쏴 사과를 맞히게 만들었지.


우린 널 불쌍하게 여겼다. 우린 네 나라 말을 할 줄도 몰라. 너 역시 네 나라 말을 할 줄 모르고 말이야. 우리가 그걸 너한테서 빼앗은 거야. 넌 우릴 미워해 마땅하다. 왜 우릴 미워하지 않지?


넌 이제 네가 되었어야 했던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네가 내내 함께했어야 했던 사람들하고 함께할 수 있단 말이다. 


- 단편 ‘역참에서’ 중

 

 

1608년 에도시대, 일본의 무사 – 사무라이 - 야마시타 도시오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조선인 소년 ‘유미’를 붙잡고 이렇게 외친다. 그 조선인 소년의 진짜 이름이 유미인지 아닌지는 사무라이도, 소년 본인도 알 수 없다. 그 이름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 땅에서 울고 있는 갓난아기를 들어올려 데려온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벌집과 꿀>은 미국 문단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는 작가 폴 윤의 대표 작품집이다. 김소연 시인이 "소설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내게서 잊힌 지 오래된 믿음을 폴 윤은 되살려놓았다"라고 말한 이 소설집에는 세계 속에서 자리를 잃고 떠도는 이들을 고요하고 깊은 서정으로 그려낸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막 출소해서 미국 북부의 낯선 동네에 자리를 잡으려는 어느 한국계 청년, 탈북한 뒤 곳곳을 떠돌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나이 든 여자,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 길을 호위하는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탈북한 한국인의 2세로 런던 외곽 한인타운에서 살아가는 부부, 러시아 극동 지방의 척박한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러시아인 장교,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고려인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는 십 대 소년,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안고 외진 산골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폴 윤은 실로 광막한 시간과 공간 속에 흩뿌려진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으로 빚어 시적인 글로 담아낸다.


폴 윤의 인물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현재의 삶에 이르게 되었는지,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조차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채, 낯설고 어딘가 어긋난 세계 속에 놓여 있다.


그들이 마주하는 환경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냉혹하거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그러나, 그들을 진정 흔드는 건 ‘알 수 없음’이라는 공백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를 끝내 해명할 수 없다는 감각. 목 깊숙이 걸려 있지만 끝내 삼킬 수도, 꺼내어 말할 수도 없는 어떤 질문.


이들은 삶의 정서적 나침반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애착과 의미가 만들어지는 감정적 기준점이 되는 장소나 인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그곳과의 연결이 끊겨 있다. 그것은 어느 방향을 봐도 같은 풍경만 보이는 들판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삶이다. 묻거나 항의할 곳도, 대답해줄 사람도 없다.


일곱 편의 단편 소설들 모두 독특하고 신선한 여운을 남긴다. 분명 자신의 삶임에도, 그 삶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허망하고 낯선 얼굴을 하고 있던 인물들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은 끝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망설이기도 하고, 막무가내로 아무 곳으로 내달리기도 한다. 이야기는 그런 인물들의 삶의 단면, 어떤 순간을 잠시 잘라 보여줄 뿐 그들이 끝내 어디에 다다랐다거나, 결국 해피엔딩을 맞았다거나 하는 완결된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아무것도 알 수 없어도 끝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뎌야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삶과 같다.


앞서 말한 에도시대 조선인 소년 유미와 그를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사무라이의 여정을 담은 <역참에서>와, <벌집과 꿀>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러시아 극동 지방의 척박한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어린 러시아인 장교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어느 한밤중 커다란 소리에 잠에서 깬 장교는 한달음에 그의 관할인 고려인 이주지에 다다른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건 우려했던 곰의 습격이 아닌 한 고려인 가족의 문제였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내가 칼로 남편을 찌르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아내는 가해자인 동시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으나 결국 고려인들의 풍습대로 남편의 동생에게 처형을 당했고, 장교는 끝내 이 참혹한 사건에 개입하지 못한 이방인에 그치고 만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참혹한 사건을 그들의 딸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빠도 엄마도 잃은 소녀는 이내 혼자가 되었고 그 딱한 사정에 장교는 종종 소녀를 찾아가고, 호신용으로 그의 말도 소녀의 집에 매어 둔다.


그러나 그러한 소동이 일어난 다음부터 조용했던 고려인 마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밤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처형된 아내가 찾아오는 환영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장교는 이러한 일을 자신의 상관에게 편지로 상세하게 적어서 전하기 시작한다. 처음 도입부부터 흡입력 있게 읽어 내려가게 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여백을 잠시 느끼게 된다.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고만 있는 삶을 잠시 멈추고, 등장인물의 호흡과 함께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이주민 가정에서 성장한 체험을 바탕으로 정체성의 갈망, 시간과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이라는 문제를 독특하고 고요한 서정으로 그려낸 폴 윤 특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