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어째서인지 여름이 한적하게 다가온다. 종강을 하고도 아직 할일이 남아 무더운 나의 고향에 내려가보지 못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6월, '초여름 밤의 낭만'으로 정평이 나 있는 '무주 산골 영화제'에서 나는 철지난 봄을 느끼고 왔다.
딸기가 끝물이라 두팩에 육천원, 네팩에 만원 할때 그래, 마지막이니 질리도록 먹어주마 하듯 미처 만끽하지 못했던 봄을 마구 사재기했다. 여름, 가을, 겨울을 버틸 기억으로 절임해둘 것이다.
무주 산골 영화제는 2013년에 시작해 벌써 13번째의 개막을 맞았다. 이전까지 무주는 1차 산업 중심으로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이었는데 이 영화제의 존재로 하여 지역 자원을 활용한 관광 활성화와 주민 참여에 활기를 띄게 되었다고 한다.
새벽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차를 빌려 무주까지 1시간여, 도착한 등나무 운동장은 여유가 가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설 필요도, 돗자리 쟁탈전을 할 필요도 없었다.
5월을 달군 대학 축제나, 일주일 뒤 있었던 뷰티풀 민트 라이프에서의 바글바글한 인파를 떠올렸을 때 이보다 쾌적한 축제 경험이 없는듯하다. 흐림이 예보되었던 날씨도 쾌청하게 개어 설렘을 증폭 시켰다.
다양한 브랜드의 팝업을 둘러보고 축제의 꽃 김치말이 국수와 고기 플레이트까지 사들고 보니 첫 순서로 NEXT ACTOR 최현욱 배우와 함께 하는 야외 토크가 시작 되었다.
넥스트 액터는 매년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차세대 배우를 조명하는 무주 산골 영화제와 백은하 배우 연구소의 공동기획 배우 특집 프로그램이다. 고아성, 고민시, 박정민 배우 등 이전 선정 배우들의 면면만 봐도 이 자리가 내실 있는 다크호스의 자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올해의 주인공 최현욱 배우는 특이하게도 스크린 데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제'의 넥스트 액터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평소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는 나로서는 최현욱 배우의 연기를 긴 호흡으로 지켜본적은 없지만, '스물다섯 스물하나', '약한영웅' 등 화제작들을 떠올려 보면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유하고 있다는데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인터뷰와 촬영 비하인드를 나눈 <넥스트 액터 최현욱> 도서 관련 이야기도 나누고, 현장 관객들의 문답도 받으면서 토크가 진행되었다. 야외 토크가 끝난 후에는 도서 출간 기념 사인회와 약한영웅 GV도 이어졌다고 한다. 넷플리스 영화 '사마귀'로 장편영화 데뷔를 앞두고 있다고 하니 그 모습 또한 기대가 된다.
이어서 최현욱 배우가 추천한 영화, 주동우, 이양천새 '주연의 소년시절의 너' 야외 상영이 시작됐다. 이 영화와는 인연이 없지 않은것이, 고등학교 수업시간에도 잠깐 본적이 있었고, 재개봉 당시에는 클립으로 맛보기를 했었다. 그래서 한껏 기대를 품고 왔는데, 무수면 상태였던 일상의 그늘이 드리워 졸음이 쏟아지는 바람에 나무 데크에서 눈을 좀 붙였다.
언제쯤 첸니엔이 삭발하는 이유를 알게 될런지, 다시 한번 다음을 기약해본다.
최고조의 더위가 한 풀 꺾이고 나서, 유다빈 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사실 메인 스테이지격인 등나무 운동장에서의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실내 영화관으로 이동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데, 이때도 공연 전 한시간 정도 리허설이 이어지는 동안 많은 관객들이 실내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저 귀로는 음악을 눈으로는 하늘과 산의 실루엣을 담으며 등나무 운동장을 지켰다.
이 무주의 공간은 여느 페스티벌과 달리 꼭 푸드트럭 음식만 먹지 않아도 되는것도 하나의 장점이다. 20보 안팍에 만두전골, 순두부찌개, 고기집 등 동네 맛집들이 드문드문 위치해 있어, 더위를 한숨 식힐겸 식사정도는 쾌적하게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들뜨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이어서 에피톤 프로젝트의 공연이 있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나지만 '오늘 같은 날 살려고 사는거죠' 라며 하늘을 보자- 말씀하셨는데 정말, 정말 많이 공감이 됐다.
미뤄둔 행복을 보상받겠다는 심보를 참 순수하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걸 알았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정재은 감독이 연출한 개막작 '바람'의 상영이었다. 1928년의 무성영화를 밴드 '반도'의 라이브 연주와 라이브 더빙으로 함께 감상했다. 실감나는 더빙은 물론 거문고, 기타, 드럼, 섹소폰이라는 신선한 세션 조합으로 말달리는 소리며 바람 부는 소리를 생생히 재현해낸 위트를 엿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개막작을 보다 먼저 일어나서 같은길을 되짚어 간 뒤 서울역에서 막차를 놓쳐 심야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결국, 영화제에 가서 제대로 본 영화 한편 없는 채로 첫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날 그 하늘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악동뮤지션의 노래 '달'의 가사 처럼 자막 없이 밤하늘 보고, 번역 없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매우 족하다.
무주산골영화제는 ‘산골’이라는 이름처럼, 서울과 멀고도 느린 시간성을 품은 자연 속 영화제였다. 탁 트인 공간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배우와 관객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산골토크’는 도심의 영화제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방식일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무슨 영화를 보았느냐보다 그 영화를 어디서, 어떤 리듬으로, 누구와 보았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동했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