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에 개막한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가 순항 중이다.
원작 팬층이 탄탄한 <오세이사>는 뮤지컬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부터 원작의 애틋한 정서가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될지 많은 기대를 모은 바 있다. 공개된 작품은 현대를 배경으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세련된 팝과 모던록 분위기의 넘버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음악에 여러 겹의 LED 스크린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계단 소품, 바닥의 무빙워크가 더해져 겹겹이 쌓이고 또 사라지는 기억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150분 동안 설렘과 감동을 함께 선사하며 순간의 감정을 영원으로 만들어주는 <오세이사>의 넘버를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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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그레이와 여름의 향
기억 속의 여름 향 레이디그레이/은은하게 나를 감싸네/
부드러운 향기 날 안아주네/따스한 그 이유 기억 향기/
온몸을 감싸는 잊지 못할 여름 향기
마오리가 친구들과 함께 도루의 집에 처음 놀러 간 날, 도루는 ‘레이디그레이’라는 이름의 홍차를 내려준다. 향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매개체다. 도루에게 레이디그레이는 누나를 떠올리게 하는 향이다. 지금은 집에 없는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했던 따듯한 기억이 모두 여기에 담겨 있다. 친구들이 차를 마시는 사이 도루는 누나가 집을 떠나던 날을 회상한다. 슬픈 기억이지만 어둡지만은 않은 도루의 표정은 누나에 대한 모든 기억이 소중하다는 걸 말하는 듯하다.
향은 옛 기억을 불러오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레이디그레이를 마시며 누나를 떠올리는 도루와 달리, 처음 레이디그레이를 맛본 마오리는 꼭 여름의 향 같다며 웃는다. 레이디그레이 향에 두 사람만의 추억이 담기는 순간이다. 물론 마오리는 내일이 되면 그것을 잊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마오리는 같은 차를 마시며 그 차를 마셨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똑같이 “여름의 향”이라고 말한다. 기억이 없어도 감각은 동일하기에, 우리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 아닐까.
너를 향해
지금 내가 여기 있어 너의 곁에/깊은 물 속이라도 영원히/
너를 향한 네 기억의 문/그 문을 열고 찾아갈래/
두렵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도/난 잊지 않아 너를
수족관에 놀러 간 도루와 친구들.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가오리를 바라보며, 도루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새삼스럽게 놀란다. 매일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일상이 마오리와 함께하며 새로운 일로 가득 찼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마오리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실망하기보다 오히려 마오리의 ‘기억의 문’을 직접 찾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도루의 다정다감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넘버다.
도루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뒤에는 수족관 배경의 LED 스크린이 펼쳐진다. 도루의 바로 눈앞에 마오리가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장막이 내려와 있어 제대로 닿지 못한다. 마치 기억을 쌓을 수 없는 마오리의 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가 여기 네 옆에 있다는 것.” 용기를 내 마오리에게 다가가자 장막이 걷히고, 도루는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말을 건넨다. 내일이면 사라질 기억이라 해도, 마오리의 말처럼 “오늘은 오늘만 오늘이니까.”
우리만 남았을 때
남겨진 시간/그 시간을 난 도저히 잊지 못했어/
우리가 남겨진 공간/그 공간을 받아들이지 못했지
도루의 가족이 중심이 되는 넘버로, 1막 내내 차근차근 쌓아온 가족의 갈등이 폭발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장면이다. 도루의 누나인 케이코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지만,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딸은 엄마의 죽음 이후 세상과 가족으로부터 도망가버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어버지는 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해 서운하기만 하다. 그 사이에서 어느 쪽의 편도 들기가 어려 도루는 마음고생을 한다.
‘우리만 남았을 때’는 두 사람이 비로소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러낸다. 날 선 감정으로 서로를 상처입히기 바빴던 아빠와 누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내보인다. 아내를 떠나보낸 빈자리가 너무 커서 자식들을 돌볼 힘을 내지 못했던 아빠와, 그런 아빠가 가여우면서도 집안을 돌보느라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할 처지가 답답했던 누나. 대화 끝에 이들은 서로 입장은 달라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에게 달려가
흩어지는 불꽃처럼 빛나는 별처럼/기억해 이 시간들은 모두 소중한 선물/
달려가 너에게 지금 달려가 이 순간 너에게 전해/기억해 나의 미소 기억해 나의 눈물/잊지 마 우리 둘만의 이 불꽃
화해의 포옹을 뒤로하고, 불꽃 터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일렉기타 소리가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누나와 아빠를 보고 지금 이 순간의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도루는 무대를 달린다. 마오리에게 가기 위해서다. 불꽃놀이가 계속되는 가운데 서로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는 도루와 마오리의 모습은 LED 스크린과 계속 움직이는 계단 무대장치로 더욱 속도감 있게 연출된다. 청춘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도루의 목소리로 시작한 곡은 중반부부터 마오리와 앙상블이 합류해 한층 웅장한 분위기가 된다. 깜깜한 밤을 수놓는 불꽃놀이는 한순간의 마법이다. 그런 불꽃놀이의 모습은 마오리와 도루가 쌓아가는 관계와 비슷하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린 끝에 마침내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은 작품의 하이라이트이다. ‘너를 향해’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도루의 감정선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으로, 1막의 마지막 곡이기도 하다.
몸에 새기는 기억
기억해 줘 우리의 시간들/아직 나에겐 선명한데/
너의 손끝 마음속 깊이 새겨진 우리들의 추억 머물러 있는 그림/그려본다 우리 사라지지 않도록/두 눈 속에 담긴 우리 모든 날들
시간이 흘러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회복하고 도루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는 마오리 앞에 도루가 나타나며 시작되는 넘버다. 도루는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처럼 일부러 떠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몸에 새겨진 기억, ‘절차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언젠가의 모습이다. 기억이 없고 기록도 지웠지만 도루에 관한 실마리가 마오리의 어딘가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도루가 자신을 기억해 달라며 노래하는 동안, 마오리는 움직이는 바닥 장치 위를 반대로 걷는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마침내 마오리가 도루를 기억해 낸 순간, 어둡던 무대가 환해지고 두 사람은 함께 노래한다. 이 넘버가 1막에 나왔던 ‘너와 나’의 리프레이즈라는 걸 눈치채고 나면 감동이 배가된다. ‘나와 너’가 두 사람이 기억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커져가는 사랑을 노래했다면, 2막 막바지에 나오는 이 넘버는 시간이 흘러 마오리가 그 사랑의 시간을 되살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루는 죽었지만, 마오리가 되찾은 기억 속에서만큼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나 이제 널 알아" 말하는 마오리의 대사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