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지나면 어제가 된다. 수많은 어제가 쌓여 기억이 되고 추억이 생긴다. 이 당연한 일이 ‘히노 마오리’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잠자고 나면 어제의 기억이 사라지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는 그런 마오리가 감정 표현은 서툴지만 다정한 아이 ‘가미야 도루’를 만나며 시작되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소설, 영화가 큰 인기를 얻은 데 이어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작품은 6월 13일 개막해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소설을 무대로 옮기며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무대에서 표현하는 것이 과제였을 것이다. 특히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기에 연기가 더 어려웠을 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장민제 배우는 어떻게 풀어냈을까? 2021년 <검은 사제들>로 데뷔 후 <비틀쥬스>, <데쓰노트>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약 중인 그에게 <오세이사>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지난 17일 그를 만나 작품 속 기억과 기록, 그리고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출연 소감이 궁금합니다.
본 적은 없지만 제안이 들어오기 전부터 소설과 영화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뮤지컬로 만들었을 때 어떤 모습일까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참여했지요. 만드는 과정에서도 창작진 분들과 많은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노력을 많이 한 작품이기에 애정이 갑니다.
히노 마오리는 어떤 인물인지도 소개해 주세요.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있어 밤에 잠들고 나면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아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을 잘 극복해 나가려고 하는, 긍정적이고 활발한 친구예요. 영화로 볼 때와 소설로 볼 때 느낌이 좀 달랐는데요. 영화 속 마오리가 일본 순정물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전형 같은 느낌이었다면, 소설에서는 좀 더 발랄한 이미지가 강해요.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고 생동감 넘쳐서 ‘발칙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도 생각했어요.
뮤지컬의 마오리는 어떤 쪽에 가까웠나요?
뮤지컬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기에 소설 속 마오리와 더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아픔을 갖고 있지만 통통 튀고 활발한 모습도 많이 보여주는 친구예요.
배우님이 마오리와 닮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해요.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점이요. 옛날 친구들이 절 만나면 예전에 제가 이랬다, 저랬다 말하는데 저는 잘 기억이 안 나거든요. (웃음) 그런 경험을 떠올리며 마오리의 상황에 이입을 해보려 했어요. 물론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것과 아예 어제의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자기 모습을 잃어가는 건 많이 다르니까 연기가 쉽진 않았어요.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기에 무대에서 표현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마오리를 좀 더 분석해 봤는데, 이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철저한 계획, 추진력 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오리는 매일매일 하루 일과를 상세히 기록하고 그걸 폴더별로 정리하거든요. 무대에서도 기록에 강박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관객이 이해하기 좋겠다 싶었죠. 그래서 도루를 처음 만났을 때 하교 시간에 있었던 일을 계속 적고 있고, 도루와 대화하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아요.
소설의 섬세한 감정선이 뮤지컬 무대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지도 궁금한데, 한두 장면을 예로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 부분을 모두가 가장 우려했고, 또 잘 표현하려 신경을 썼어요. 뮤지컬이니까 음악에 감정선을 많이 담으려 했는데 그중에서 저는 2막 첫 곡인 ‘소거’를 꼽고 싶어요. 마오리의 꿈속에서 시작해 현실로 나가는 노래예요. 꿈속에서 여러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이들을 좇는 마오리의 모습이 몽환적이면서도 서늘하게 표현됩니다. 일상에서 마오리는 밝은 모습이지만, 마음속에는 이런 혼란과 불안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노래 중반쯤 되면 마오리가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서 책상에 앉아 일기를 읽습니다. 자신이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죠. ‘소거’를 부르는 장면은 전체적으로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모호하게 연출했어요. 꿈 같은 현실도, 현실 같은 꿈도 있잖아요. 둘을 명확히 구분하려 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시간을 기록하는 사람과 기억하는 사람
배우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또는 넘버는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드린 ‘소거’와 함께, 기억을 되찾은 마오리가 도루와 같이 부르는 넘버 ‘몸에 새기는 기억(너와 나rep)’을 좋아합니다. 무대를 헤매던 마오리에게 어느 순간 도루의 기억이 찾아와 둘이 같이 부르기 시작하죠. 함께 노래를 시작하는 그 순간에 매번 큰 울림을 느껴요. 잃어버린 나를 찾았다는 벅찬 감정과 함께 도루를 다시 잃고 싶지 않다는 마오리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마오리는 기억 없이 자신의 기록만으로 도루를 매일 새롭게 만나는 셈인데도 그때마다 도루를 좋아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배우님이 본 도루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마오리의 사소한 것도 잘 기억하는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죠. 그런 다정함과 섬세함은 의도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스며드는 것 같아요.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 마오리 곁에 좋은 사람이 참 많네요. 물론 마오리도 선한 사람이고요.
맞아요. 이즈미도 좋은 친구고, 뮤지컬에서는 소설에 없는 ‘사에구사 켄토’라는 인물이 마오리의 새로운 친구가 되기도 하죠.
소설을 읽을 때 마오리와 도루 사이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이즈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기억이 나요. 도루가 죽고 이즈미 역시 친구를 잃은 셈인데, 그걸 나눌 사람이 없는 거니까요. 뮤지컬에서는 켄토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이즈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예요. 또 소설에서 마오리가 병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못 사귈 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렇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으니 무척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말씀을 듣고 보니 네 사람에게 각각의 분명한 역할이 있네요.
작가님이 첫 연습 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마오리는 시간을 기록하는 사람, 도루는 그 시간을 기억해 주는 사람, 이즈미는 시간을 지워주는 사람이고, 켄토는 그 시간을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고요. 그 말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관객분들도 이런 관점으로 각 인물을 바라본다면 공연을 더 재미있게 보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보면 <오세이사>는 기억과 기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배우님은 실제로 기록 같은 걸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기분이 안 좋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록을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러고 나니 일기장에 힘든 내용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는 마오리처럼 좋은 내용이든 그렇지 않은 내용이든 매일 일기를 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괜히 거창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일기가 안 써졌는데 마오리 일기에도 대단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 뭘 먹었고 어딜 갔는지 정도라도 적어두려 해요. 그것만으로도 하루를 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돼요.
당연한 오늘은 없기에
기억과 기록을 뛰어넘는 것도 있을까요? 기억과 기록을 다 잃어버려도 남아 있는 무언가가요.
소설에서 마오리는 매일 아침 어제의 기억이 없는 상태로 눈을 뜨는데, 그때그때 기분이 달라요. 그런 걸 보며 생각해 봤는데, 기억은 사라져도 그 기억이 가진 정서적 상태는 남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마오리가 기억을 쌓지 못하면서도 도루를 좋아하게 된 것 역시 그 때문이 아닐까요. 둘이 함께한 시간이 기억이나 기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정서적인 형태로 마오리의 몸에 남았던 것이죠.
한편으로는 꼭 모든 기억이 필요할까 싶기도 해요. 이즈미가 마오리에게서 도루의 기억을 지운 것도 그 기억이 마오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었잖아요. 힘든 기억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더 나을까요?
전 너무 힘들었던 기억은 지울 것 같아요. 힘듦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면 괜찮은데 힘듦만 남아 있는 기억이라면요. 마오리의 기억은 슬프기도 하지만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도 분명히 있죠. 그랬기 때문에 복원할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반대로 딱 하루 동안의 기억만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싶으세요?
하루의 기억만 가지고 살고 싶진 않은데… (웃음) 그래도 하나 고른다면 작년 말에 떠났던 가족 여행이요. 너무 바빠서 여행을 못 가다가 정말 오랜만에 갔던 여행이었는데 가족과 함께 있으니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부모님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목표가 없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범위를 좁혀서 올해 해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인터뷰를 하고서 목표 없이 그냥 열심히 살아봤더니 장단점이 있더라고요.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어느 순간부터 목표는 분명히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웃음) 목적지가 있는 상태로 달리는 게 마음이 편할 때가 있잖아요. 올해는 사실 목표를 정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는데, 인터뷰를 계기로 생각해 보니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사는 게 올해의 목표인 듯해요.
작년에 부상이 있었는데 아파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건강이 1순위입니다. 다행히 쉬고 있던 운동을 최근에 다시 시작했어요. 전보다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져서, 이 상태를 잘 유지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저희가 진짜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공연이니까 꼭 오셔서 재밌는 시간 즐기다 가시면 좋겠습니다. 기억과 기록의 의미를 생각해 보시고, 삶에도 적용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요. 제가 마오리를 보며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 것처럼, 관객분들도 공연을 보고 하루하루를 기록하며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게 된다면 이 공연의 의미는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아요.
*자료제공: (주)라이브러리컴퍼니, 유니버셜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