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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책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 오래된 편지가 건넨 따뜻한 위로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큰 줄거리나 극적인 전개가 없는데도, 오래도록 잔잔하게 기억에 남는 책이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가볍게 웃음 짓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이 뭉클해진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미국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렌이 런던의 서점 '채링크로스 가 84번지 마스크 서점'에 책을 주문하면서 시작된 서간문 형식의 책이다.
낯선 도시에서 주고받은 편지 – 그리고 마음
헬렌은 까칠하고 유쾌하며 솔직하다. 그녀의 편지는 마치 수다스러운 친구와 대화하는 듯한 친근함이 느껴진다.
반면, 서점 직원 프랭크는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정중한 영국 신사다. 그리고 또 한 명, 서점에서 함께 일하는 세실리도 편지 속 소소한 이야기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20년에 걸쳐 주고받은 이 편지들은 단순한 책 거래 내역을 넘어, 서로의 삶을 건드리고 변화시키는 진짜 소통의 흔적이다.
특히 이 책에서 재미있는 점은, 편지 말미에 쓰이는 서명과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점차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 프랭크는 “마크스 & Co. FPD 드림”이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이후 “마크스 서점을 대표하여 프랭크 도엘 드림”, 그리고 점점 친근하게 “프랭크 드림” 또는 “프랭크”로 바뀐다. 또 헬렌을 부르는 호칭도 초반에는 “친애하는 부인”에서 “친애하는 한프 양”, 마지막에는 “친애하는 헬렌”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편지를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에도 미소를 짓게 된다.
책이 곧 사람이고, 편지가 곧 관계였던 시대의 아름다운 기록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일
『채링크로스 84번지』가 특별한 건, 그 안에 담긴 ‘사람’ 때문이다.
헬렌의 익살스러운 농담, 프랭크의 조심스러운 배려, 그리고 서점 직원들의 소소한 반응들까지. 한 통 한 통 읽다 보면, 그 작은 서점 안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국가와 문화, 계층과 거리를 뛰어넘어 '진심'이 도달하는 그 과정이 너무 따뜻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리고 다시 기억하고 싶은 감정
요즘은 누가 누구에게 편지를 쓸까?
이메일도 길다고 느끼는 시대에, 이 책은 말한다. 편지엔 시간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헬렌과 프랭크의 우정은 그 기다림 속에서 단단해진다.
책장을 덮고 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오랜 마음을 건네본 적이 있었나?”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조용하지만 깊은 책이다
이 책은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그냥 오래된 편지 모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람’의 감정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뉴욕의 아파트와 런던의 서점, 두 공간은 물리적으로 멀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우리 모두에게 낯설지 않다.
지금, 조용히 마음을 꺼내볼 책을 찾고 있다면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추천한다.
가끔은 오래된 활자가 가장 따뜻한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