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은 슬픔과 닮았습니다. 굉장히 복합적인 성질을 띠고 있어, 그 여운이 짙게 남습니다. 마치 쓰디쓴 약이 혓바닥에 닿았을 때처럼 말이죠. 이내 삼키면 몸에 좋지만, 그 과정이 너무 씁니다. 인상을 찌푸리게 되고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언짢은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사랑 그 자체도 그러한데, 현실과 부딪힐 때는 그 강도가 세집니다.
셀린 송 감독의 2024년 작품,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는 사랑이라는 모래를 손에 움켜쥐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첫사랑이었던 '나영'이 한순간에 사라진 이후로, 그녀를 찾았던 '해성'은 인연의 끈이 끊기지 않도록 애씁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를 만나러 뉴욕까지 찾아간 그는, 끊길 듯 말 듯한 인연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결국 뒤돌아선 두 사람의 슬픔은 우리의 마음마저 먹먹하게 만듭니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본 후, 저는 여운에 잠식되어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제 상황과 경험 때문에 그랬을까요. 혹자는 이 영화가 너무 담담하고 잔잔하여 재미없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자극적이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너무 소중하지요. 이야기만으로 우리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는 이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큰 울림을 선사했습니다.
어떤 후회를 하실 건가요?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중에,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그랬더라면'이라고 하며 과거를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바뀌지 않을 과거에 애써 신경 쓰며 마음을 닳도록 하죠. 그러나 어떠한 선택에도 후회는 있기 마련입니다. 선택과 후회는 필수 불가결한 관계입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라오죠.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때, '무엇이 나은가' 혹은 '무엇이 최선인가' 보다는 '무엇을 후회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나영'은 현실을 택했습니다. 나영의 현실이란, 극작가로서의 삶 그리고 남편과의 안정적인 관계였습니다. 나영도 해성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현실을 택했습니다. 해성과의 마지막 헤어짐에서는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그저 슬퍼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져서 나온 농도가 짙은 눈물이었습니다.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요, 흐느낄 정도로, 마음이 저려올 정도로, 입술이 떨릴 정도로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제가 '나영'이었더라면, 현실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을 뒤로 하고, '에잇, 몰라' 하며 인연을 택했을 겁니다. 아마 나영과 저는 결이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인연'이라는 강한 끌림을 택하고 안정감 있는 '현실'을 잃는 후회를 할 것 같습니다.
인연이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사랑은 8천 겁의 인연이 쌓여야 한다고 합니다. 겁이란 쉽게 말해서 '엄청나게 긴 시간'을 말하는데, 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그중 사전에 의하면 세상이 한번 개벽하고 그다음 개벽할 때, 다시 말해 이 세계가 창조되고 무너지는 것을 8천 번 겪어야 사랑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1겁을 43억 2천만 년으로 보았고, 수로 가늠하기 어려운 만큼의 세월을 머금어야 이 생에서 사랑의 인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 옛날 인간에게는 원래 세 가지 성이 있었다. 이들은 둥근 등과 원형의 옆구리, 네 개의 손과 다리, 둥근 목,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귀, 두 개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똑바로 걸을 수도 있고, 여덟 개의 사지를 이용하여 수레바퀴 모양으로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이 인간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무척 오만하여 신들을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신들은 인간을 전멸시킨 경우엔 제사와 공물을 받아먹을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인간을 둘로 나누어 놓음으로써 힘을 약화시켰다. 제우스는 인간이 항상 자신의 잘린 단면을 보며서 분별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아폴론을 시켜 양분된 사람들의 얼굴과 목을 잘려나간 쪽으로 돌려놓도록 했다. 그런 후에 잘려나간 부분을 오늘날 배라는 불리는 부분으로 당겨서 염낭을 묶듯이 묵었는데, 그 묶인 지점이 바로 배꼽이다. 이렇게 인간은 본래의 상태가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각각은 자신의 또다른 반쪽을 갈망하고 그것과의 합일을 원하게 되었다. 에로스는 이처럼 원초적 합일로의 복귀에 대한 동경이다.
플라톤, <향연>, 박희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3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원래 인간은 두 명의 인간이 하나의 형체로 함께 있었다고. 그러나 신이 그들의 힘과 능력을 질투하여 그들을 갈라놓았습니다. 이렇듯 인연은 본래 하나였던 몸이었기에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서로를 찾을 수 있고, 우리는 반복하여 사랑을 갈망하고 갈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연은 단순한 이끌림이나 한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죠. 처음 보자마자 느꼈던 강한 이끌림은, 언젠가 사라질 가벼운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이자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신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인연이라고 생각되는 이를 만났을 때 쉽게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인연을 포기하고 현실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영이 인연을 가볍게 여겼다는 건 아닙니다. 확언할 수 없지만, 나영은 현실을 더 사랑했던 것이죠. 사랑은 결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후회를 하시겠습니까?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후회를 하든지 모두 당신이기에,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