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는 순간, 발터 벤야민이 남긴 문학적 파편들이 마치 꿈속의 망상처럼 우리의 시야를 채운다. 파울 클레의 몽환적 선과 색채가 곁들여진 50여 점의 삽화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벤야민이 그려낸 언어의 풍경에 살아 숨 쉬는 ‘시각적 공명’을 선사한다. 이번 국내 최초 완역판 《고독의 이야기들》은 벤야민 문학의 숨겨진 보석들을 한데 모은 기념비적 성과로, 그 중요성은 “벤야민이 쓴 문학작품들이 지금껏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된 적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라는 가디언의 찬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책은 크게 꿈과 몽상, 여행, 놀이와 교육론 등 세 부로 나뉜다. 각 부는 벤야민이 평생 천착해온 주제—이성의 영역을 넘나드는 꿈, 낯선 공간에서 피어나는 상상, 그리고 어린이적 언어로서의 놀이—를 각기 다른 문학 양식으로 실험하고 있다. 짧고 강렬한 42편의 단편들은 모두 오래도록 미발표되거나 조각으로만 남았던 텍스트들로, 편집자들의 세심한 분류와 해설 덕분에 비로소 온전한 ‘별자리’로 완성되었다.
1부: 꿈결처럼 반짝이는 언어 실험
1부에 실린 ‘몽상’과 ‘꿈’에 관한 이야기들은, 벤야민의 정신이 일으키는 섬광 같은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거센 강물의 슬픈 포효가 전해져오고 있었다”라는 문장에서는 벤야민 특유의 섬광 같은 이미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밤에 꾼 꿈이 현실의 고통을 반영한다면, 공상은 오히려 고통 없는 세계의 비전을 그려 보이기도 한다.
“달에서 흘러내리는 빛은 일상이라는 무대의 조명이 아니다. 달빛이 미심쩍은 듯 조명하는 곳은 다른 지구, 다른 행성 어딘가에 있는 장소 같다. 지구는 달을 위성으로 거느리고 있는 행성에서 달의 위성으로 변신한 것 같다. 시간이라는 호흡을 이어나가던 지구의 넓은 가슴은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는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피조물은 낮에게 벗겨짐당했던 과부의 베일을 착용할 수 있게 된다.”
달2(p.86)
이처럼 밤이 된 현실에서 꾸는 꿈은 고통 없는 세계의 망상이고, 달빛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존재의 이중성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지구, 다른 행성’이라는 표현은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가시화하고, 낮의 시선 아래 숨겨졌던 내밀한 감각을 ‘과부의 베일’이라는 상징으로 불러온다. 이처럼 벤야민은 일상 너머의 장소를 언어로 소환해, 독자를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깊은 사유의 지점으로 이끈다.
2부: 문턱을 넘는 여행자의 시선
2부 '여행'은 지상과 해상을 오가며 낯선 풍경과 마주친 화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기차역과 항구라는 ‘문턱’을 넘나들며 이성의 규범과 망상의 세계 사이를 유영하는 이야기들은, “여행은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생활을 열어낸다”는 벤야민의 통찰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스코테호의 항해’ 단편에서 배 위를 광란의 도시로 상상하며 선장은 아무 권위도 없다는 선언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일종의 해체적 시선을 드러내는 대목은 특히 압권이다. 이처럼 2부는 ‘이동’이란 행위 자체를 철학적 실험 장치로 삼아, 독자를 사유의 ‘여행’으로 이끈다.
3부: 놀이와 교육—어린이의 언어로 세상 읽기
3부 ‘놀이와 교육론’에서는 벤야민이 어른들에게 권하는 어린이적 언어의 회복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행운의 손’ 대화편(40번)에서 도박을 “탈을 쓴 놀이”로 규정하고, 불확실성을 즐기는 태도를 사유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도박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위험 상황입니다. 도박은 내가 얼마나 침착한 사람인가를 시험하는 다소 신성모독적인 방법이고요. 위험 상황에서 몸은 그 일을 가까이하면서 생각을 멀리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위험한 상황을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정리해보게 됩니다. 행동하는 것이 아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도박이 왜 나쁜 평판을 얻었을까요. 우리 같은 유기체의 극히 정밀한 메커니즘을 함부로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행운의 손(pp.284-285)
이 대목에서 벤야민은 ‘놀이’로서의 도박이 인간의 신경·심리적 메커니즘을 어떻게 직격하는지 파고든다. 일상의 안전장치가 해체된 위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몸이 먼저 반응하고 사유가 뒤따르는 인간 조건의 근본을 목도하게 된다. 이렇게 ‘행동의 우선성’과 ‘사유의 상대성’을 강조함으로써, 벤야민은 놀이를 단순한 유희가 아닌 인식론적 실험장으로 끌어올린다.
또 라디오 매체를 놀이의 영역으로 확장한 ‘라디오 게임’(36번)은 미디어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놀이처럼 실험해보는 기발한 시도이다. 이어서 수수께끼(35번), 우스운 이야기(37번) 등 짧고 기민한 텍스트들은, 언어의 유희적 가능성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3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연상시키면서 마치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세계를 구성하듯, 읽는 사람도 동참하게 되는 즐거운 경험을 선사한다.
읽고 난 뒤, 남는 것
<고독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다. 짧은 단편마다 숨은 언어의 분출을 몸으로 느끼며, 독자는 벤야민이 제안하는 ‘이야기 들려주기’의 실험실 한가운데 서게 된다.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이야기로 꿰매고, 어린이적 유희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만드는 이 책은, 마치 오래된 지도를 펼쳐들고 잃어버린 여행지를 찾아 나서는 듯한 기쁨을 준다. 특히 1부의 몽환적 이미지들이 주는 ‘언어의 시각성’과 3부의 놀이 실험이 전하는 ‘사유의 현장성’에는 깊이 매료될만 하다.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도, 중간중간 멈춰 음미하며 다시 넘겨봐도 좋고, 때로는 거꾸로 읽어보며 새로운 문맥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모더니티의 증인이자 이야기꾼이었던 벤야민의 문학적 실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낯설고 유효하다. 잃어버린 경험의 붉은 실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면, <고독의 이야기들>이야말로 반드시 펼쳐야 할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