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성의 핵심은 '전과 같지 않음'에 있다. 사건 후의 세상은 언제나 이전의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한다. 방향이 끝없이 뒤틀리는 선로처럼, 사건들의 축적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저 손잡이를 꾹 잡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간혹 기차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기차 자체를 멈춰 세우려는 돌출적인 시도들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범인(凡人)에게는 너무나 먼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니 내 관심은 언제나 사건 이후의, 비틀거리는 삶에 맞춰져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이후의 삶을 더 길게, 더 지난하게 버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건의 후폭풍이 후-산들바람 정도로 약화될 때까지, 일상의 진동으로 남을 때까지, 날리는 머리를 끝없이 정리하고 옷깃을 탁탁 터는 무용한 반복 행위가 그러나 무의미 하지는 않다고 여긴다. 그것이 사건성에 맞서는 나의 유일한 포즈이기 때문인지, 그러한 이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마음이 끌려왔다.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 <견고딕걸> 역시 사건성을 버티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검은 직선의 세상에 자신을 가둔 청소년과 그 가족을 따라가는 <견고딕걸>은 다만 그것을 뚫고 나올 용기를 아주 버리지는 않은 주인공이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 이전 사건의 여진을 견뎌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견고딕걸>은 온통 새카만 옷과 화장에 자신을 가둔 아이 '수민'의 무시무시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내 면상에, 인상, 인생, 인성에 신경 끄라고!' 소리 치는 수민은 그러나, 에어팟을 벗고 메탈락 밖으로 내몰리는 순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수민은 고속터미널에서 또래의 한 여자아이를 만나고, 초면인 그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수민이 겪은 사건을 묘사한다. 수민의 쌍둥이 수빈이 또래 친구를 기차 선로 아래로 밀어 사망하게 하고, 본인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살인사건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공소권이 소멸된 상황.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사라지면서 분명히 발생한 사건이 뭉그러진 가운데, 유명한 작가이자 강연가였던 최진희(어머니)와 남극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던 김우철(아버지), 쌍둥이와 많은 것을 공유하던 수민은 모두 단번에 무너져내린다.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어기제가 모두 제각각이듯, 이 가족들 역시 모두 다른 선택을 해나간다. 진희는 일종의 이지화 반응을 보이는데, 이해불가능한 고통에 이성적인, 그러나 다소 부자연스러운 논리를 붙여 해소하려는 방어기제이다. 책에 파묻혀 생전 수빈의 정신상태를 분석하고, 결국 그럴듯한 병명을 붙이는 것으로 수빈을 이해하고자 한다.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조문객을 받을 자격이 있냐'며 울부짖고, 수빈 대신 가해자의 자리에 자신의 온몸을 묶어둔다. 그 그림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속죄를 대신하는 것이다. 우철은 그에 비해, 사건을 회피한다. 술에 취해 괴로움을 잊으려 하고, 대화를 거부한다. 그들은 각각 블랙홀과 맨홀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서툴게나마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건 수민이다. 평소에도 어둡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수민 역시 거대한 입을 벌리는 싱크홀에 빠져 있지만, 가치관이 유동적인 청소년기에 놓인 덕인지, 보다 넓은 가능성을 본다.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지은에게서 각막을 이식받은 미나의 제안으로 지은의 부모님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역시나 심장을 이식받은 현지를 만나며 우정을 쌓고, 수민은 직접 피해자의 부모를 마주한다.
연극은 그러나 수민이 은지의 부모를 직접 독대하는 장면 직전까지만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분명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연출이다. 싱크홀에 빠져 있던 수민이 자력으로 이를 거슬러 오르고, 빠져 나와 외면했던 과거와 과오를 마주하기 위해 발버둥친 이 과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설령 은지의 부모님이 물건을 던지며 수민을 내쫓으려 한다 하더라도, 수민은 사건성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맞서려는 노력을 한 것만으로도 천천히 삶의 주인이 되어갈 수 있다.
<견고딕걸>에서 인상적인 연출이 있었다면, 지문이 배우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는 것이다.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 4명은 모두 퇴장 없이 무대 가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문을 읽는다. 여기에 함께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이 직접 라이브 연주를 하면서 생동감을 더한다. 각 인물의 심리적 변화가 중요한 이야기인 만큼, 악기와 배우들의 목소리를 조합해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또한 주인공들의 '마음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기 위한 연출이라는 점에서도 청각적 자극들은 절묘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이야기성'을 극대화 하는 세심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청소년이었을 때 해당 연극을 관람했다면 더욱 와닿는 지점들이 많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으로서는 다소 감정적으로 치우친 듯 여겨지는 대사나 상황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견고딕걸>은 사건성을 버티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각성을 안겨주는 극이다.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던 이들에게, 사건성을 이기는 것은 또 다른 사건들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즉 삶의 지속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