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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판소리를 한 번쯤은 접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판소리는 익숙한 장르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이기도 하고, 고수와 소리꾼으로만 무대를 채우는 판소리의 매력을 알아가 보고 싶었기 때문에 언젠가 한 번쯤 판소리 공연을 관람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판소리 뮤지컬 <적벽>을 알게 되었다. 흔히 노래, 춤, 연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뮤지컬을 종합예술이라 부른다. 판소리와 뮤지컬의 조합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지만, 이 두 장르가 만나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 판소리 공연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것을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판소리에 사용되는 생소한 전통 어휘였다. 전통 음악인 만큼 판소리에는 한자어, 고어 등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이 많다 보니, 과연 공연을 관람한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두 번째는 무대 연출 부분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판소리는 고수와 소리꾼 오로지 두 사람이 무대를 채워간다. 하지만 콘서트, K-POP, 페스티벌처럼 화려한 조명과 강렬한 사운드로 가득한 무대를 자주 접해온 나로서는, 과연 판소리가 그만큼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쉽게 판소리 공연을 관람하지 못했지만, 이번 <적벽> 공연을 통해 판소리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판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공연은 아니었지만, 판소리를 처음 접하는 작품으로는 가장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판소리가 과연 화려한 공연예술만큼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을까 했던 내 우려가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더 나아가, 판소리는 그 자체로도 다른 공연예술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장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적벽의 매력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판소리 '적벽가'를 현대적으로 편곡하고, 현대무용을 더한 작품이다. 삼국지 내용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를 사전에 잘 알지 못하더라도 공연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도원결의와 삼고초려 장면은 워낙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공연에서 이를 시각적으로 그대로 재현한 듯한 느낌이 들며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적벽은 여러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동남풍> 장면이었다. 극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장면이었고,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뮤지컬의 화려함과 판소리의 강렬한 소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특히 북 연주와 배우들의 춤이 어우러지면서 그 강렬함은 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말을 타고 추격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표현할 때 배우들이 목마를 태워 거대한 말을 형상화한 장면은 긴박한 상황을 눈앞에서 실제로 목격하는 듯한 생동감을 전해주었다.


뮤지컬처럼 화려하면서도 판소리의 고유한 특징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가 무대를 채우는 것이 특징인데, 극 중에 도창이 내레이션하며 극의 흐름을 이끌었고, 무대 중간에는 연주자들이 악기를 들고 배우들 바로 옆에서 연주하며 고수의 역할을 그대로 살려냈다. 또한, 판소리만의 고유한 매력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즉흥성에서 나오는데, 실제로 군사 점고 장면에서는 '조조' 역을 맡은 추현종 배우가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며 즉석에서 새로운 대사를 던져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무대 연출이었다. 무대와 구조물은 모두 흰색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적벽대전 장면에서 적벽을 구현하기 위해 등장한 커다란 빨간 구조물을 제외하면, 다른 색조차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가 전혀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붉은 조명이 흰 무대를 비추며 마치 거대한 도화지 위에 치열한 전투를 그려낸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부채'를 활용한 다양한 연출도 눈에 띄었다. 사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미리 정보를 찾아보는 편이지만, 적벽은 인생 첫 판소리 공연이었기에 온전히 그대로 접해보고 싶어서 사전에 정보를 찾아보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판소리 뮤지컬인 만큼 부채가 사용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부채는 극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다양한 연출을 통해 그 쓰임새를 보여주었다.


부채는 때로는 싸우는 무기로 활용되었고, 거대한 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부채를 활용한 춤이었다. 배우들이 부채를 던지고 다시 받으며, 마치 K-POP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칼군무를 선보였는데, 이를 적벽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적벽대전 이후에는 조조의 군대와 그에 대항하는 군대를 흰색과 빨간색 부채로 구분해, 많은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상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무대 뒤편에는 오픈된 형식으로 연주팀이 배치되어 있었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 보았지만 친숙하지 않았던 전통 악기들을 실제로 연주하는 모습을 통해 그 매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극이 절정으로 향할 때는 꽹과리와 드럼 연주가 돋보였으며, 연주자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관객들까지 더욱 신나게 만들었다. 또한, 무대 양옆에 설치된 한글과 영어 자막 전광판을 통해 놓친 대사나 어려운 어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소개하고 싶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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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무>라는 무용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 공연도 적벽처럼, 좋은 의미에서 큰 충격을 준 작품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장르라 할지라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좋은 공연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적벽 공연을 관람하며 오랜만에 다시 그 생각이 떠올랐다.


좋은 공연을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그 감동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기에, 추천하기 전에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혹시 나만 재미있게 본 건 아닐까. 하지만 적벽은 그러한 우려를 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내가 느낀 감동을 누구든 똑같이 느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준 공연이었다. 화려하면서도 본질은 잃지 않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아 재미까지 놓치지 않았다.


적벽은 기존의 판소리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렸을 뿐 아니라, 전통예술이 현대적으로 변주되었을 때 어떤 새로운 매력을 선사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전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지만, 이를 단순히 과거의 것 그대로만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은 전통을 정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 온 예술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판소리는 '어렵고 낯선'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적벽처럼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인 무대 연출과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공연이 많아진다면 기존에 전통문화에 관심 없던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흥미를 가지지 않을까. 더 넓은 층의 관객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전통의 가치가 시대에 맞게 해석되고, 새롭게 확장되며 더 넓은 층의 관객과 어우러지기를 바란다. 따뜻한 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과 재미를 선사할 공연 <적벽>을 추천한다. 적벽은 4월 20일까지 국립 정동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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