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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3월 22일 토요일, 봄날의 햇볕과 광장의 열기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목뒤에 살짝 땀방울을 맺는 봄의 온기가 한껏 풍겼지만,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이에 화답하기에는 너무 많은 피로와 울분에 차 있었다. 전 국민을 혼란과 공포에 빠뜨렸던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벌써 1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계엄’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범국민적 위협에 주저 없이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마저도, 꽃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산뜻한 봄날에까지 윤석열의 파면을 부르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계엄 이후 정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흘러갔다.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국민과 국회의 힘으로 빠르게 막아냈다며 세계 언론의 찬사를 받았던 때는 벌써 아득한 옛일이다. 너희 나라 괜찮은 거냐는 외국인 친구들의 걱정에도, 잘 해결될 것 같다며 오히려 희망의 미소를 지어 보였던 12월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웠다. 한국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피로 지켜냈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와 극우 세력의 영상들이 언론에서 보도될 때, 의심과 불안은 점점 더 커져 거센 파도를 일었다. 여러 변명과 사정으로 광장에 함께하지 못했던 나는 ‘미래의 당연한 안녕은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더는 동료 시민들에게 나의 안위를 빚질 수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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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생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더 나은 세상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언어와 문학과 사상과 철학과 문화 등을 배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회의 정의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인간은 고통으로 가득 찬 생 속에서 어떻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급속 경제 성장 이후 인문학의 가치를 경시하고 있고, 이는 비단 연구나 학업의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거친 조류이다. 이와 더불어,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제되지 않은 타인의 언어를 그대로 흡수하면서 자란 세대가 유권자가 되었다. 즉,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과 이를 중요시 하는 정도가 모두 낮은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된 것이 ‘이 지경’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물론 기성세대 또한 이러한 사회 기조로부터 피해 갈 수는 없다. 어쩌면 한국뿐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 전반이 마찬가지이다.


혹 자신이 특정 커뮤니티, 특정 유튜브 채널, 특정 종교단체의 말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댄 대통령이 ‘고도의 통치 행위’라는 말로 내란을 변명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환율이 널뛰고 병원에 의사가 없어 국민의 건강권이 위협받고 있는 이 혼란한 상황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 객관적으로 성찰해 보았는가. 본인이 지지하는 정당 혹은 정치인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의 이익이나 공동체적 신념에 부합하는가. 뒤돌아보니 나에게 남은 것은 혐오와 배제밖에는 없었던 것이 아닌지 스스로 확인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고작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도 열심히 공부해서 법조인이 되고 정치인이 되었는가?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존엄한 인간임을 안다. 그리고 타인 또한 존엄함을 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연대야말로 아름답고,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바로 서리라 생각한다.

 

 


바람은 불안의 파도를 만들었지만, 깃발 또한 펄럭였다. 


 

나에게 이번 윤석열 탄핵 집회의 정점은 깃발 행진이었다. 각자의 이름을 가진 깃발들의 행렬이 무수히 이어진다. 사회자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누구누구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덧붙인다. 깃발의 주인이 누구이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서로 존중하며 어우러진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알며, 이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여기에 왔다. 슬프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공동체에서 지켜야 마땅할 가치는 위기의 상황일수록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함께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얼굴을 보았다. 당찬 기개가 가득했지만, 지친 기색 또한 역력했다. 나는 한국의 대학생을 잘 안다. 학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스펙을 쌓기 위한 대외활동들을 하고, 생계 또는 용돈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상 사회’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한 모든 일을 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도록 세팅해 놓고, 이제는 ‘정상 사회’라는 게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며 거리로 내모는 꼴이다. 어쩜 이럴 수가 있는지. 광장에 나온 대학생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회에 나오지 못한 몇 명의 친구들이 미안하다며 내게 연락이 왔다. 나는 그동안 꾸준히 집회에 나왔던 참가자들에게 미안했다. 도대체 누가 미안해야 한다는 말인가.


모두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나의 생존을 위해, 나의 인권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나의 동료를 위해, 나의 조국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모두 정체성을 달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혹은 모여야만 했던 것은 현 정부가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주권을 가진 한 명의 국민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상식과 약속을 자꾸만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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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믿어봄 직한


 

어느덧 16차 범국민대행진이었다. 서로의 답답함을 알고 있는 참가자들은 희망을 잃지 말자며 격려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나에겐 희망이다.


법 문서에 적혀있는 글자들은 권력 앞에서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4개월간 거듭 확인하고 있다.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관념 속에서 길을 헤매다 마주한 부조리함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깃발이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일상에서 스쳐 지나갈 법한 그 많은 얼굴들이다. 그 사람들이 여기에 멈춰 서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양옆, 앞뒤로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물성은 대체할 수 없는 위안이 된다.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기에 존재를 확신한다.


우리는 함께 투쟁한다. 우리가 다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질 때 생기는 관념이 미래의 우리에게 빛을 비추도록.


살랑이는 봄바람이 안도의 한숨과 반갑게 섞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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