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장 보는 엄마를 따라 대형 마트에 가던 날은 성인이 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물건이 무엇이든 클릭 한 번이면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대형마트를 찾을 일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기억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렸을 때처럼 자주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대형마트에 들르곤 한다.
지하 1층 식품 코너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과일 코너다. 과일을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사지 않더라도 '오늘은 무슨 과일이 나왔을까?' 하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일 코너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분명 다양한 과일들이 가득했는데, 요즘은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끈 샤인 머스캣이나 스테비아 토마토 같은 잘 팔리는 과일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저마다의 색을 잃고 유행만을 따라가는 사람들처럼, 과일의 세계에도 유행이 생기며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과일의 세계에서도 다양성이 사라지고, 못난 과일들은 상품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점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아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와중 <공씨아저씨네, 차별 없는 과일가게>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은 15년 차 과일가게 공씨아저씨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에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한 과일가게의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책에는 미처 놓치고 살던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과일을 통해서 바라본 시각으로 담고 있었다. 저자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하는데, 저자의 바람처럼 책을 읽으며 점점 더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좋았던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과일로 바라본 세상
작년 여름 못난이 농산물에 대해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농산물에도 존재하는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버려지는 농산물을 '못난이 농산물'이라고 칭하며 판매하는 것에 대해 성공적인 마케팅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며 달리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긍정적인 워딩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이미 차별이었음을 뒤늦게 자각했다."] p.25
저자도 처음에는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외형이 예쁘지 않다고 못난이라고 부르는 것마저도 차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고 한다. 못난이 농산물이라고 칭하며 여전히 마케팅을 하고 있는 과일가게나 브랜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소비자가 외형이 다르다고 해서 해당 농산물을 무조건 배척하는 대신 외형이 달라도 품질에 중점을 두고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못난이', 'B급'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그냥 과일 자체의 이름으로만 팔리게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과일을 새벽 배송으로 받기 위해 거치는 과정들을 접하면서 미처 놓치고 있던 편리함 이면의 농민들의 수고를 알게 되었다. 맛있는 과일을 계속 먹기 위해서는 이를 생산하는 농민들의 삶이 지속 가능해야 하는데 지금의 퀵커머스 시대에는 편리함은 존재하겠지만 농민들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예쁘게 포장된 과일만을 접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간 맛있는 과일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휴일 없이 일하는 농민들의 수고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과일 하나 편리하게 먹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과일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라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결국 공씨 아저씨네와 같은 업체를 선택하기보다는 새벽 배송을 해주는 업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씨 아저씨네를 더욱 응원하고 싶어진다.
과일에게 명절이란, 과일 세계의 다양성
책에서 알게 된 가장 새로운 사실은 명절이 과일에 미치는 영향이다. 명절이 지나면 집에 먹을 것이 많아져 소비 심리가 위축되기 때문에 과일 구매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래서 명절 후에 과일을 팔기 위해서는 가격 할인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아직 생산할 시기가 아닌 과일들도 명절 전에 미리 수확한다. 결국 소비자는 제철이 아닌 과일을 먹게 되는 것이다.
명절은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휴일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 오르는 과일은 제철이 아닌 덜 익은 과일이다. 이 점이 참 안타깝게 느껴진다. 누구를 위한 명절일까. 저자는 오히려 명절 이후 과일을 수확해서 팔게 된다면 소비자는 맛있는 과일을 섭취할 수 있고, 농가들도 여유롭게 수확하고 높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게 바로 공생 아닐까. 명절에도 잘 익은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어느 순간 새콤달콤한 과일에서 '새콤'을 담당하는 신맛을 느끼기 어려워졌다. 소비자가 신맛을 꺼리게 되면서 농가들은 점점 산미를 낮추고, 당도를 올리는데 힘쓰고 있다. 실제로 거봉으로 유명한 경산의 포도밭이 이제는 샤인 머스캣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결국 앞서 언급한 과일의 세계에서도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못난이 농산물'이라고 부르며 겉모습이 조금 달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식재료라는 인식은 점점 퍼지고 있지만 정작 과일 안에 담긴 다양한 맛에 대한 존중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식재료의 매력인데도 불구하고, 점점 당도에만 집착하며 그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
과일의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다양한 선택지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다양성이 존중된다는 것은 결국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움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각각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계절의 흐름도 느낄 수 있고, 과일을 먹는 즐거움도 커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과일의 외형뿐 아니라 맛의 다양성도 인정받으며, 소비자가 다양한 과일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품종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이 선물하는 맛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공씨아저씨네, 차별 없는 과일가게
이외에도 '농가 돕기'라는 이름으로 팔리지 못한 농산물을 할인 판매하는 일이 사실은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손해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과일 하나를 생산하는데도 얼마나 많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얽혀 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책에는 과일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공씨 아저씨네의 일화뿐 아니라 공씨 아저씨네와 함께 일하는 협력 농가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사람의 소중함을 점점 잊어가는 시대에 오래 이어져 온 인연 하나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공씨 아저씨네의 태도는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모습이라고 느껴진다.
저자는 과일 유통업계에서 자연, 농민, 소비자의 공생을 꿈꾼다. 과일의 세계 속에서 조금씩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며 변화를 이끌어가는 저자처럼 우리 사회도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며 좋겠다. 사회 문제는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씨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그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고, 결국은 모두가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가 올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