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 사람이다. 정확하게는 대구 옆의 경산, 비공식 위성도시쯤 되는 촌 동네 출신이다. 내 고장 경산이 대구의 동쪽 허리를 꿰차고 있다면, 구미는 대구의 북서쪽 길목을 지킨다. 귀성길인 경부고속도로는 구미를 지나 대구로 진입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구미는 일종 대구의 수문장인 셈이다. 그리고 이 세 개의 시 市 사이, 대구의 북쪽 머리로는 거대한 팔공산이 떡하니 버티어 서 있다. 하나의 산을 마주하고 있는 세 개의 시라니, 참 커다란 산이었고 참으로 가까운 고장들이었다.
연극 ‘구미식’에의 호기심은 이러한 ‘지연 地緣’에서 비롯된 셈이다. 물론 그 단어를 첫눈에 담을 때에는 ‘구미호’를 가장 먼저 떠올리긴 했지만 말이다. 구미식이라, 익숙한 단어를 품고 있는 낯선 낱말, 어떤 의미인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없는 제목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하지만 나무위키에서 알게 된 그 의미를 여기 옮겨 적는 건, 엄청나게 꺼려지는 일이다.
‘구미식’은 구미 스타일이란 의미이다, 구미 스타일의 매춘 형태. 나무위키에는 그 유의어로 ‘북창동식’이라는 예시를 들고 있는데 아뿔싸, 하필 내가 매일 점심을 먹는 곳이 그 북창동이다. 나무위키에는 그 예시, ‘북창동식’에의 링크가 붉은색으로 비활성화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예시의 뜻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선배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를 여기 옮겨 적는 건, 앞선 것보다 더욱이나 꺼려지는 일이다. 지금이야 한창때에 비하자면 거의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라고들 말하지만, 지금도 정동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나온 늦은 밤, 그 거리를 지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엔 여전한 호객행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내려는 듯이. “아가씨 있어요.”
제목이 벌써부터 우리를 어떤 심각한 상상으로 인도하고 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하지만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제목과 내용이 큰 상관성을 가지지는 않았다. ‘성 姓’에 관련된 소재는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극이 심각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극은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의 ‘Heroin’의 가사를 독백하며 시작한다.
Cause when the smack begins to flow
Then I really don't care anymore
Ah, when the heroin is in my blood
And that blood is in my head
Then I really don't care anymore
-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Heroin 가사 中
연극 ‘구미식’은 가상의 구미라는 공간 배경 안에서 마약, 독재자 우상숭배, 그리고 세뇌와 선동과 프로파간다를 다루는 작품이다. 제목이 가리키는바 성 姓, 정확히는 매춘이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았을 뿐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성적인 제목이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구미인가 하는 질문을 안고서, 나는 기억 속의 연극을 되짚어본다.
극은 많은 상징과 차용을 활용하고 있다. 등장인물인 ‘테네시 윌리엄스’와 ‘프랭크 멀로’는 실존 인물로, 그의 초기작이자 그를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유리 동물원’이 작품 안에 소재로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이 극이 어떻게 오마주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극은 책을 소품으로 사용하였을 뿐 그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테네시와 프랭크의 서사 또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는데, 외지인의 이름을 한 그가 어쩌다 이 먼 나라의 지방 도시, 구미로까지 흘러들어왔는지도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알 수 있는 것은 그 두 사람이 동성애자였다는 것, 딱 그뿐이었다. 의아한 인물 설정이다.
초반 사건 전개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행복한 동상’의 대화를 통해 진행된다. ‘행복한 동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유명 동화인 ‘행복한 왕자’의 캐릭터를 차용했다. 눈은 사파이어와 루비, 피부는 금박으로 장식된 동상이 제비를 통해 자신의 보석들을 나누어 주고, 이내 허름한 모습이 되었다는 그 동화이다. 하지만 극 안의 ‘행복한 동상’은 박정희의 동상이라는 설정을 통해 원작의 설정을 180도 비튼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동상의 가슴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리어 있었는데, 그건 10.26 사건을 암시하고 있고 극도 딱히 이 상징의 원관념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구미인가 싶었다. 실제로 내 고장, 소위 ‘TK’에서는 아직도 심심찮게 그 사람의 이름과 그에 얽힌 칭찬을 쉬이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생각일랑 없다. 일정 그들을 이해할 수 있기에,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모습,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시장에 가면 덤을 얹어주고, 주변의 빈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선모금을 할 줄 아는. 그들은 아주 나긋한 언어로, “그분은 참 고마운 분이야.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었지.”라고 말한다.
내 고장에는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이 있다. 그중 한 가지 일화가 기억 속에 ‘퍼뜩’ 떠올랐다. 아마 중학생 때쯤이었을 것이다. 시골 동네는 패스트푸드 매장이 얼마 없었는데, 그 촌 구석에도 맥도날드와 롯데리아 매장이 하나씩은 들어서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여담이지만, 그 맥도날드는 전국 최저 매출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고 결국 폐점하고 만다. 한편 롯데리아는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맞은 편의 매장 만은 자주 간판이 바뀌곤 하였다.
어느 날 맞은편 매장에 우스운 간판이 걸리고 만다. 흰색 바탕에 아무런 무늬도 없이, 커다란 궁서체 글씨로 이렇게 쓰였다. “더 이상 고 박정희 대통령님을 매도하지 말자!” 나와 내 친구들은 그 간판을 보며 한참을 낄낄거렸다. 대체 그 사람이 뭘 했길래, 대관절 저렇게 우스운 간판까지 세상에 내걸리게 된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 그때는 이 사안이, 그러니까 정치적 사안이 한 개인에게 얼마까지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지를, 그를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바칠 수 있는 지까지를 이해하기엔 어렸다.
서울에 상경하고 나서는 그 반대의 이야기를 주로 듣게 된다. 그리고 내 고장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실제로 그건 어리석은 말들이고 틀린 생각이라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양편의 현실을 두루 바라보지 못한 채 뱉어지는, 산술적 무지의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이쪽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눈앞의 상황만을 인지할 수 있고, 인식과 사고는 그 좁은 테두리를 쉽사리 넘어서지 못한다. 이곳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자리한 TK는, 대부분 극단적이고 다혈질적인 빨간 맛이었다. 내 눈에는 두 지역의 사람들이 유사한 형태의 논리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되 다만, 인식 속에 강렬히 자리하게 되는 것은 극단적인 행태들뿐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회색지대에 남아 있기로 한다.
극은 황금 동상이 된 박정희를 통해 독재자에 대한 우상숭배를 표현하고 있고, 그 태도는 여실히 비판적이다. 박정희 동상은 ‘테네시 윌리엄스’를 통해 빈민들을 통해 자신의 보석들을 나누어주는데, ‘테네시’는 그 대가로 마약을 전해 받는다. 정확히는 마약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제공받는다. 박정희로부터 ‘시민들’은 보석을, ‘테네시’는 마약을 제공받는 것이다. 시민들이 받은 ‘보석’의 원관념에는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고 이는 극의 주제의식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다. 결국 구미식의 대주제 중 하나가 우경화된 시민들의 독재자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극은 우경화된 가상의 구미 시민들이 박정희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는 대가로 그를 칭송하고 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익히들 아시는바, 과거 독재 체제 하 급속 성장 시대에 영남권은 수많은 혜택을 받았고, 구미는 개중 대표적인 도시이다. 구미는 박정희의 고향이었던 까닭에 항구도 인프라도 없던 뜬금없는 내륙 지방으로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것이 ‘보석’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우경화는 현재 진행형인 사안이고 혜택은 과거의 일이므로 시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극이 가리키고 있는 그건, 무언가 다른 것이다.
동상은 새빨간 조명 아래서 독백한다. ‘나의 시민들은 나와 한 몸과 같은 존재이다. 경제가 안 좋아지면 그건 전부 노조 탓이고 사회 문제 탓이라고, 즉 남 탓할 줄 아는 사람들이며, 그런 그들은 나의 아주 좋은 친구들이다. 나와 내 노동자들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사람들한테 많은 보석을 나눠줬지만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들이고, 끝없이 불만을 쏟아내는 아주 훌륭한 족속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끊임없이 주는 보석은 일종의 마약이며, 이건 “고도의 통치행위”, 마치 계엄령 같은 것’이라고.
정리하자면, 테네시가 옮기던 ‘보석’은 노조와 사회운동가 등 좌파 정치 세력에 대한 적대 선전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대립 세력에 전가함으로써 생겨나는 심리적 안정과 연대의식이라는 것이다. 그건 ‘마약’과 같은 것이고, 이를 이용해 시민들을 정치 결집하는 것은 계엄령과 같은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동상은 주장한다.
구미시의 경제 쇠퇴는 직접 가보지 않아 생생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전해 듣는 바가 많다. 이는 반도체 공장 등의 해외 이전 탓에 꽤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온 사안이나, 현실 문제는 늘 그랬듯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만 다루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그리고 이를 차분히 관조만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나와 같은 ‘경계 바깥’의 인물뿐일 것이다.
어떤 종류든 위기가 자기 자신의 일이자 당면 현실인 때, 사람의 정신은 혼란과 불안을 오가고 그 틈새로는 쉽사리 갖가지 종류의 거짓이 새드는 것을 보아왔다. 사람의 불안과 혼란을 읽고 그 정신의 틈새로 사이비 종교와 미신과 거짓 신앙을 불어넣던 사람의 짐짓 심각한 얼굴과 교묘한 사기와 위조, 높다란 보상과 손쉬운 탈출구라는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던 사람의 비릿한 얼굴과 열띤 감정과 거친 단어들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빨갛게 달아오르던 선동가의 얼굴이 차례차례 기억 속에 떠오른다. 비싼 부적이 약속하는 지복, 승려가 권하는 값비싼 공양 법회, 구원과 천국을 약속하는 십일조, 100% 오를 것이라던 주식 종목과 부서진 식탁, 아버지의 망가진 포크레인과 가압류 딱지, 조만간 경마공원이 개통되면 2배는 뛸 것이라던 토지 위로 나 있던 삭막한 검불들과 숨을 조여 오는 막대한 대출 이자. 세상에는 뭐 이다지도 사기가 많던지.
우리가 쉬이 이해치 못하는 이런 속삭임들, 세상 어느 누가 저런 얄팍한 술수에 당하겠느냐고 결코 믿지 못하겠다던 사람의 흔한 얼굴들. 허나 그 반대편에는 이 속삭임을 마지막 구원이라도 되는 양 매달리는 사람들, 남아있는 손 패도 희망도 없는 사람의 다급하게 일그러진, 초라한 얼굴과 절실한 손길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내 고향에는 그런 얼굴들과 그에 속아 우는 피 끓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거짓을 속삭이는 자의 온전한 잘못인가, 아니면 이내 그에 합류해 같이 떨어진, 또 다른 사기, 또 다른 증오를 일삼는 사람들에게도 공평히 나누어질 잘못인가. 나는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았다. 증오는 손쉽고, 그에 대한 비판도 손쉽다. 비판은 분명 필요한 일이고, 시대는 그를 통해서만이 차차 오랜 시간을 거쳐 변해갈 것이나, 현실은 그 1차원적인 비판보다도 수 배는 복잡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행복한 동상은 가상의 구미 속 새마을운동 기념공원에 위치해 있고, 등장인물들은 이 ‘공원’, 명백한 물리적 실체가 아닌 가상의 정신적 실체가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며, 점차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숨이 막혀온다고 말한다. 그런 등장인물을 향해 동상은 ‘너 빨갱이야? 너 공공파업노조지? 화물연대지?’라고 말한다. 이내 이 공원이 싫냐며, 허공을 휘두르며 가상의 공원을 잡아 뜯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그로부터 광고가 등장한다. 이건 전부 광고라고, 지방 선거를 위해 꾸미고 덮어둔 예쁜 광고이자 찌라시라고 말한다. 무엇이 잘못인가? 지방 선거를 위해 과거를 이용하는 자의 잘못인가, 그에 동의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에까지 나뉘일 잘못인가. 나아가 선거라는 제도의 승리를 위해 그러한 변용을 일삼게 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자 벗어날 수 없는 수순이라면,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인가?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않았다.
극은 나아가 이러한 현상, 독재라는 극단적 정치 행태와 그에 대한 극우 세력의 무비판적 지지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를 당면 현실의 문제와 결합시킨다. ‘계엄령’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으나, 나아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종북 반국가세력’이라는 인용을 통해 극은 이 두 정치 현상을 적극적으로 결합시킨다. 어제 3. 1절 광화문엔 한 손에는 태극기를, 다른 한 손에는 성조기를 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하지.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상경해, 계엄을 옹호하고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나는 그 현상에 대해 가치 판단하지 않는다. 자유란, 혼란과 방종과 무질서마저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시금 묻는다. 누구의 잘못인가. 전광판에 커다랗게 걸리는 저 사람의 얼굴, 교묘한 거짓을 말하고 증오를 종용하는 자의 온전한 잘못인가, 아니면 그에 합류해 또 다른 증오를 일삼는 사람에게도 공평히 나누어질 잘못인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아가, 즉흥적이고 우발적이며 근시안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자신의 정치 생명과 사회인으로서의 생활 일체를 내건 일생일대의 도박을 행한 저 사람만의 잘못인가, 그런 사람을 스스로 선택한 우리에게까지도 공평히 나누어질 책임인가. 나는 내가 손쉬운 답을 내리지 않길 바란다. 비판하되, 악마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우상화와 유사한 원리이고, 단순히 그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
극의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과 논의는 이상으로 하고, 내용 및 연출에 대한 비판을 마저 마무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끝맺도록 하자. 동상이 말한바, 보석이 일반 시민에게 준 ‘마약’과도 같다는 말에서는 해석상의 혼란이 발생한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바로 동상으로부터 직접 마약을 받았고 또 시민들에게 전달한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메인 주인공으로서, 동상에 의문을 표하고 종국에는 대립하는 인물처럼 유도된다.
그렇다면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테네시’도 그 마약을 복용하고 심지어는 전달하는 사람, 측근의 하나였으나 넓어지는 ‘공원’에 숨이 막혀 탈출과 저항을 시도하는 존재라는 것.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간접적이거나 미약했다. 나로서는 인물의 전환 과정 없이, 그러니까 테네시가 마약에 취했다가 정신을 차리니 낯선 장소에 다다르는 식으로 막이 전환되던 것과 마찬가지 의뭉스러움이었다.
그는 모텔 화장실에서 약에 취한 채 정신을 잃은 다음, 갑자기 고교 시절의 폭력 교사가 있는 학교에서 정신을 차린다. 막 전환이 주로 이런 식이다. 그 교사는 자신이 행한 폭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악을 심었다. 악바리. 그래서 애들이 잘된 거라고, 다 지나고 나면 자기네가 잘못한 거라고 말했다.’ 허나 폭력교사의 폭력적인 태도와 자기 합리화를 독재자의 그것에 동일시하기에는 그 사이에 논리적 간극과 층위의 다름이 존재하고, 하물며 테네시가 그 교사와의 조우를 통해 느낀 바나 변화된 바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 입장에서 ‘테네시’는 그저 동상을 돕고 그 대가로 마약을 공급받다가, 갑자기 동상이 싫어진 사람이다. 아무 설명 없이 말이다.
극은 논리적인 전개 대신, 수시로 막과 주제를 전환하며 민첩한 전개를 택한다. 독특하고 신선하긴 했지만 정신없는 연출들로 눈과 귀를 바쁘게 했다. 내용이 전개되다가 멈춘 다음엔 인터넷 저급 찌라시 광고가 틀리었고, 그때마다 등장인물들이 제4의 벽을 넘어 막 전환을 고했으며, 막 간 내용상 이어지지 않는 주제들이 단선적으로 등장하였다. 작품 내적으로만 보면, ‘테네시’는 구미 공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며, 어떻게 만났는지 두 사람의 관계성은 베일에 싸여 있으나 ‘프랭크 멀로’와 게이 커플이다. 하지만 게이라는 주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단 한 장면, “구미시는 게이를 혐오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만 일회성으로 등장했고, 그가 ‘외국인’으로 설정되어야 했던 핍진한 이유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저 사내가 ‘김철수’가 아닌 실존 인물 ‘테네시 윌리엄스’여야 했던 이유를 이해치 못한다. 물론 ‘게이’라는 설정도 외국인이라는 설정도 반드시 핍진한 설명을 요하는 것일 의무 따위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또한 테네시가 어쩌다 마약에 중독되었는지 극은 다루지 않는다. ‘테네시’는 극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베일에 가려져 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어쩌다 마약을 하게 됐는지도 알 수 없고, 마약을 구하기 위해서 황금 동상을 위해 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마약에 취한 채 눈을 뜨면 새로운 공간으로 순간이동하듯 도착해, 몽롱한 상태로 무기력한 말들을 뱉는다. 나는 이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몰입에 실패했다. 메신저에 대한 몰입이 깨지자 극과 나의 거리는 멀어졌고, 내 태도는 ‘경계 바깥’의 제3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제목, ‘구미식’이라는 단어는 연극 내내 단 한 번 등장한다. 막을 끊으며 등장하는 찌라시 광고의 문구 속에서 짧게, ‘구미식 A코스 10만 원, B코스 17만 원.’ 허나 그것 또한 일회성으로 소비되고 만다. 매춘과 관련된 내용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적 연관성 또한 없었다. 어쩜 그것이 구미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적 사회 현상의 본질을 한 번에 관통하는 어떤 상징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해석에 실패하고 만 것일지도.
연극은 우경화된 가상의 구미, 새마을운동 기념공원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이것이 ‘가상’이라는 낱말을 단순 차용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가상’이라는 말은 비판을 위한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TK 대구 경북은 실제 우경화된 도시이고, 새마을운동공원은 구미에 있으며, 그것도 ‘박정희로’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가상’의 것은 없었다. ‘황금 동상’이나 ‘공원’이 가상의 것이니 공간도 가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소 설정은 꽤나 직설적이다.
이것은 구미라는 도화지 위에 펼쳐진 상상이다. 하지만 자극적이었다. 실제 구미의 마약 문제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굳이 마약이라는 소재를 선택해야 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다. 그 소재 자체가 자아낼 수 있는 음산하고 광기에 찬 분위기도 연출상 기대해봄 직하며, 시민들의 정치 성향의 외견이 지니는 맹목성 및 중독성과의 유사성을 상징해봄 직하지만, 달리 표해 직설적으로 풀어보자면 ‘우경화된 정치 성향은 마약과 유사한 면모를 띈다’라는 설득력이 약한 급진적 명제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이 가리키고 싶은 현실 문제가 많았기에, 각 소재를 다루는 물리적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학교와 교사, 악바리 문화, 독재자 숭배와 우경화, 계엄령과 극우 정권, 구미식, 그러니까 구미 스타일의 매춘 행위, 마약, 게이 혐오까지. 뜨거운 소재들이 많이 첨가되었지만, 충분히 소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자면, 생각할 거리가 많이 제공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 덕분에 리뷰가 이렇게 길어진 것처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