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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 파랗다[ 파ː라타 ]

1.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새싹과 같이 밝고 선명하게 푸르다.

2. 춥거나 겁에 질려 얼굴이나 입술 따위가 푸르께하다.

3. (비유적으로) 언짢거나 성이 나서 냉랭하거나 사나운 기색이 있다.


파랗다는 말이 입술에서 터져나올 때의 파열음을 사랑한다. ‘ㅍ’이 나오면 그 다음 부드럽게 흐르는 유음 ‘ㄹ’의 힘을 딛고 거센 ‘ㅌ’으로 터져 나오는 마침.


파랗다는 말이 당장 나를 물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푸른색이 주는 심상은 그토록 독보적이고 강렬하다. 이쯤하면 눈치챘겠지만 파랑을 오래도록 외사랑 중이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소리를 관찰하곤 한다. 누가 그래 싶겠지만 정말 파란색 커버가 마음에 들어 골라든 책이었다. 게다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니 그이라면 이 색을 수식으로 가져갈 법하다고 동의했다. 사실 나는 붉음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었지만.


블루베이컨_평면.jpg



미술과 문학의 멋진 조화:

프랜시스 베이컨을 읽다. 그의 그림들을 쓰다.


뮤진트리에서 펴낸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

 

프랑스의 소설가인 야닉 에넬은 프랑스 퐁피두 센터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 전시회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고독한 카라바조]의 저자이고 프랜시스 베이컨에 관한 글을 여러 편 발표한 작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맞춤한 기회다. 하지만 전시회장에 들어간 에넬은 갑자기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밀폐된 공간에서 안과적 편두통 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한밤중에 겨우 제정신을 차린 에넬은 모순된 강렬함의 상태에 사로잡혀 전시회를 탐험하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조지 다이어(베이컨의 연인)의 죽음을 기리는 3부작과 같은 여러 그림과의 대면을 통해 작가는 베이컨의 그림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극도의 감각적 미궁을 돌면서 베이컨의 그림에서 덜 알려진 측면, 즉 그의 색채의 관능미, 그의 파란색의 성적 신선함 등을 자신만의 언어로 드러낸다.

 

베이컨에게 오래 천착해온 저자가 화가의 작품들을 홀로 대면하며 떠올린 성찰의 결과물이자, 미술과 문학이 한 몸처럼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외로움, 뒤틀림


 

베이컨은 그의 생 내내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이었다. 화가가 되기까지 그의 삶을 꾸려주었던 긍정적 밑바탕이란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 끝이 없는 모든 종류의 강렬함은 종종 예술활동의 양분이 되지만 예술가가 아닌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안고사는 것일 테다.


남들보다 조금 더딘 시작, 평범하지 않은 성애, 화목하지 않은 가정. 베이컨이 지닌 외로움의 배경을 말하자면 이런 설명들이 나열된다. 외롭다는 감정은 오늘날 파편화된 사회 속 개인에게는 살아 존재하는 한 늘 자리 한켠을 내줘야 하는 존재이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아닌가. 그러나 외로움은 무섭게도 곧잘 불안과 우울을 자석처럼 끌어와 때때로 삶과 사람을 세차게 흔든다, 지치도록.

 

 

"나는 이 책이 베이컨의 그림들을 존재하게 만든 단어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면 좋겠다. 문학의 모호함 자체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문학은 단지 문장의 세계를 조정할 뿐이지만 이러한 문장을 통해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조명한다고 주장한다. 이중의 소명은 항상 광적인 일이다. 이러한 모험을 하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없다." _ 107p


 

베이컨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다는 뭉크의 절규도, 영화 전함 포템킨도 작업활동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도화선이 되었던 게 아닐까. 작가는 그 동요를 캔버스 위에 온갖 살들의 뒤틀린 향연으로 풀어냈다.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저 말들의 교집합 어딘가에 베이컨의 작품이 존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언제나 그 이상이다. 사조는 그림의 외면을 일컫는, 그러니까 눈이 동그랗고 코는 뾰족하다 등의 표면적 설명일 뿐이다. 어째서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마음이 동했는지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공감이었을까. 매분매초 가만히 앉아 쉬질 않는 마음을 태연하게 피부로 닫아낸 나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느껴지던 부유감. 편히 속할 곳 없이 정처하는 고독. 기쁨 끝에는 언제나 걸려있던 고통. 어쩌면 그 반대일 때. 차라리 맺히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피부와 팔다리가 주는 오묘한 편안함. 잔인하지 않다. 적나라한 묘법은 오히려 위로가 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저자의 견해에 일정 부분 합의를 이룬 것 같다.

 

 

"분명히 하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폭력과 잔인함의 화가가 아니다. 가학적인(그리고 우리가 예술가들을 미치광이로 믿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다. 카라바조나 베이컨처럼 위대한 화가는 악의 편에 서지도 않고 악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_ 52p

 


 

특이하게도 도판이 없는 에세이답게, 저자는 친절하지 않은 서술로 그림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다. 늘어놓는다, 라고 느낀 까닭은 읽고 있자면 그의 기억을 함께 톺아보는 기분이 들어서다. 베이컨이 저자에게 불러일으킨 고독, 사랑, 충격의 기억들은 시공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꿈꾸는 듯한 기분도 든다. 판타지 영화 속에 초대된 것처럼 작품, 그 다음엔 저자의 기억을 넘어 나의 감정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시퀀스가 흥미로웠다.

 

마음껏 두 발을 땅에서 뗀 채 유영해도 좋다고, 달뜬 기분으로 감정의 구석구석을 내달리다보면 이상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인간이 고기라고 말했나. 고통을 그리는 화가라 말했던가. 어느새 그런 말들은 머릿속에서 희미해진다. 새로운 문 뒤에 약간 미소를 띤 베이컨의 얼굴이 가까워 온다. 편안하지 않은 길을 잘도 지나왔다고, 웃으며 앞서 걷는다.

 

 

"나는 그림과 문학 사이의 매혹적인 틈새에 서 있다. 내가 가장 편하게 숨 쉬는 곳이 바로 거기다. (…) 단어와 색채가 서로를 찾고, 교차하고, 얽히고, 맞물린다. 나는 글을 쓰면서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내 손가락 아래 미지의 호수가 열린다. 그리고 이 반짝이는 허공에서 나는 몸을 씻는다. 이것이 나의 진정한 삶이다."

 

_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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