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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파랑'일까?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은 '빨강'이었다. 비단 베이컨이 자주 사용하는 색 중 하나라서가 아니라 빨강이 주는 심상이 그의 작품 세계와 잘 어울린다는 게 이유였다. 빨강은 사랑, 정열, 힘을 상징한다. 이는 우리 몸에 흐르는 피와 연관이 있는데, 우리의 장기 곳곳에 산소를 운반하여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인 적혈구가 곧 붉은 색이기 때문이다. 피가 흐르지 못하는 곳은 곧 피부가 곪고, 썩고, 문드러져 창백한 푸른색을 띠게 된다. 몸이 죽어가는 것이다. 즉, 빨강은 우리가 살아 숨 쉬도록 도와주는 활기의 색이고, 파랑은 죽음과 소멸, 무기력을 상징하는 침몰과 침체의 색이다. 베이컨의 작품 속 인물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어딘가 왜곡된 형태를 띠고, 그들 모두가 기쁨보다는 우울감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으나 인물은 절대 죽어있지 않다. 강렬한 대비와 거친 터치,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크게 벌린 입 등에는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움츠러들게 하는 생생함이 있다. 베이컨이 그린 인물은 모두 죽어가고 있으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박력이 있다. 베이컨의 작품을 보며 빨강을 떠올린 이유다. 다만, 베이컨의 작품에서는 인물이 이러한 빨강을 고이 몸속에 간직하지 않고, 바깥으로 뿜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왜 '파랑'일까? 이는 저자가 느낀 편두통과 관련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야닉 에넬'은 프랑스 퐁피두 센터 미술관에서 열린 프랜시스 베이컨의 전시회에 참석한다. 조금 특이한 점은 참석한 시간이 이미 미술관의 문이 굳게 잠긴 한밤중이며 관람객이라곤 야닉 에넬 자신밖에 없단 점이다. 오래도록 사랑하던 작가의 전시를 나 홀로 즐기는 영예를 누리게 되다니. 말만 들어도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밤이어야 할 텐데 저자의 미술관에서의 밤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계속해서 앓고 있던 편두통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의 특별한 밤은 자신의 몸을 뉠 간이침대를 찾으러 가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여정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저자의 이런 통증 가득한 여정에서 책의 제목인 '블루 베이컨'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간이침대에 누워 진통제 트라마돌의 약효가 돌기를 기다렸다. 그는 약효가 도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트라마돌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마의 아랫부분이 풀리고, 여전히 식별할 수 없는 고요함이 눈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꺼풀 아래 불의 띠가 드리워져 있는데, 타는 듯한 느낌이 진정되면 이 띠는 천천히 파란색으로 변한다. 바로 이 파란색을 향해 가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머릿속에 오아시스를 만들어야 한다.

 

야닉 에넬, 블루 베이컨, 이재형 옮김, 뮤진트리, 2025, 36p

 

 

다소 추상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이는 두통으로 인해 긴장하고 있던 미간에 힘이 풀리고, 타는 것같이 아팠던 눈에 수분을 되찾아 눈물이 흐르는 회복의 과정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머릿속에 오아시스를 만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앞서 파랑이란 죽음, 소멸, 무기력을 상징하는 색이라 하였다. 여기서 파랑의 다른 뜻을 떠올려 보자. 바로 '우울감'이다. 영어에서는 종종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I feel blue, 나 지금 우울하다는 뜻이다. 파랑은 우울, 울적함, 슬픔, 눈물까지 상징하는 침체의 색이다.

 

베이컨의 작품이 가지는 위력은 빨강의 뜨거운 심상과 닮았다. 한편, 파랑은 베이컨이 그려내는 작품의 주제와 연관이 있다. 베이컨의 작품 속에 난무하는 고통, 공포, 혼란, 폭력 등은 사람의 생명력이 끝없이 추락할 때 맞는 최저점, 죽음과 관련 있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혼돈이 반드시 죽음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나, 사람이 죽는 과정에는 반드시 이 중 하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이 가라앉는 것을 표현한다고 해서 보는 이들도 함께 수면 아래로 끌려가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작품이 가감 없는 '파랑'을 그림으로써, 관람객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만의 오아시스를 만들어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마치 편두통에 시달리던 저자가 눈물, 즉 '파랑'을 거쳐 통증에서 벗어난 것처럼.


혹자는 작품에서 너무 가혹한 표현과 설정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는, 아예 그러한 소재들이 등장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 특히 '오락성'이 짙다고 여겨지는 게임과 만화 같은 분야는 특히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목적 자체가 재미인 분야에서 가혹하고, 비극적인 현실의 고통을 다룬다면 비슷한 고통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의 상처가 가볍게 취급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리고 책은 베이컨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내 작품이 거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놀랍니다. 내 그림은 폭력적인 그림이 아니라 즐거운 그림입니다. 5분간의 텔레비전 뉴스가 내가 그린 그림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란 말입니다." 작품에서 폭력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에는 폭력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작품 속의 모든 인물이 미소 짓든 그렇지 않든, 현실에는 우는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 만약 세상의 모든 작품이 행복하다면, 마음속에 '파랑'을 안고 사는 이들은 자신만의 오아시스를 만드는 데 더 많은 힘과 시간, 인내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하도록 도와준다. 내면에 자리한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슬픔을, 마음속에 짙게 깔린 안개를 작품은 단어, 문장, 색채, 점·선·면, 음률, 내러티브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추상에서 구상으로 전환하고, 사람들의 내면의 안개를 걷어내 준다. 그리고 작가 또한 막연하던 작품의 첫인상을 끝까지 완성해 구현해 냄으로써 자신 속 안개를 걷어낸다. 안개가 걷히면, 우리는 오아시스 탐색을 위한 다음 단계에 착수할 수 있다. 베이컨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자, 자신이 방치했던 연인인 조지 다이어의 죽음을 3부작으로 그려내 죄책감, 슬픔, 절망 등 뒤섞인 '파랑'에서 자신의 오아시스까지 향하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몸을 떨게 만드는 베이컨의 충격적인 작품세계는, 그 어떠한 모습을 가진 이라도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따스한 격려이며, 실제로 그 어떠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도 작품에 자신을 이입하고 몰입하기를 허용하는 포용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과 닮은 '가혹한' 작품을 보며, 나 이외에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이해자가 세상에 하나 더 있음을 느끼며 안심한다. 가감 없는 모습이, 정제되지 않은 표출이 야만적이라 하던가? 야만적인 것은 위로가 된다. 작가는 끝없이 오아시스를 향해 길을 찾는 사람이며, 관람객은 오아시스를 찾고 싶은 사람이다. 우리는 계속 오아시스를 찾고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들락거릴 것이며 다시 이를 반복 또 반복할 것이다. 작품의 요소와 내면의 경험을 연결 짓고, 의식의 흐름에 글을 맡겨 끝없이 비유와 비유를 일삼는 <블루 베이컨>의 저자처럼, 나만의 감상으로 회장의 복도를 채우면서 계속, 계속. 사람의 내면에 파랑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이걸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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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일러스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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