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1886년 작품, <작품>은 시대가 요구하는 화법과 취향에 대항하고 자신의 본연의 색깔을 지켜내려는 화가, 클로드 랑티에의 고뇌와 외로움이 담긴 이야기이다. 크리스틴을 만나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을 그리지만 사람들이 퍼부은 신랄한 조소와 비웃음 속에 묻힌다. 그는 대중과 친구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정에 목말라 방황한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그림 앞에서 목을 매달아 삶을 마친다. <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당시 사람들은 <작품>의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를 폴 세잔이라고 생각하였고 폴 세잔 또한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처참하게 죽은 결말로 인해 평생 친구였던 에밀로부터 말로 형용하지 못할 만큼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사무적이고 딱딱한 편지만을 남긴 채 이별을 고했다.
다니엘르 톰슨의 2015년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에서 에밀과 폴은 이렇게 말했다. “난 늘 패자 편에 설거야.”, “그럼 우린 늘 함께하겠군.” 그들은 서로 닮아서 사랑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생각을 말했을 때, 질투와 배신감 같은 감정을 느꼈다. 멀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멀어졌다. 매섭고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할퀴었고 평생 닿지 못할 만큼 멀어졌다. 달곰한 희망을 덕지덕지 감싼 말은 진심이 없었기에 가벼웠다. 마음의 무게를 담지 않은 말, 금방 들켜버리고 공허함만을 줬다. 에밀 졸라의 청춘을 담았다고 알려진 <작품> 속엔 청춘이 아닌 클로드에게 투영한 세잔의 삶 속 비참함, 외로움을 담았고 심지어 그를 처량하게 죽였다. 따라서 졸라가 세잔에게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이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시각예술작품을 통해 클로드가 폴 세잔임을 알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나이는 들었지만 위풍당당한 낭만파의 거장이야! 그리고 그 후에 쿠르베가 등장했지. 그는 견실한 노동자이며 세기의 가장 진실한 화가였어” 클로드가 말했다. 실제로 세잔은 들라크루아와 귀스타브 쿠르베의 영향을 받아 초창기에 <눈 녹는 에스타크>처럼 어두운 색감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또한 <작품> 속 클로드와 그의 친구인 상도즈에게 영감을 준 작가 또한 세잔과 졸라가 예술에 입문한 계기와 같다. “빅토르 위고의 장대한 무대와 끊임없는 대립의 상충 속에서 전개되는 거대한 상상력은 그들을 완전히 서사시에 빠져들게 했다. 그 다음에는 시인 뮈세가 나타나 열정과 눈물로써 그들을 매료했다.” 세잔과 졸라는 알프레드 뮈세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읽고 예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클로드에게 영감을 준 작가가 실제로 세잔에게 영향을 준 작가와 일치하다는 점을 통해 클로드가 세잔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클로드가 그린 그림 중 세잔의 작품과 가장 닮은 것은 정물화이다. “클로드는 쟁반 위에 놓인 네 개의 사과와 병, 도자기 항아리로 구성된 정물화를 그렸다.”이는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 병을 그린 정물화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외에 클로드의 그림 중 세잔의 작품과 비슷한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유월의 초목들 사이로 펼쳐진 풀밭 위에, 벌거벗은 한 여인이 한쪽 팔을 베고 가슴을 부풀리며 누워있다. 전경에 검은색의 대비를 넣을 필요를 느끼고 그 자리에 단순히 벨벳 윗도리를 입은 신사를 그려넣었다.”크리스틴을 모델로 그린 클로드의 <야외>에 대한 설명을 통해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모티브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작품의 뒷이야기 또한 똑같다. <야외>는 살롱 낙선전에서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는 살롱 낙선전에 전시된 <풀밭 위의 점심>을 비난한 사람들과 몸싸움을 벌였다는 세잔과 졸라의 실제 이야기와 같다. 이를 통해 <야외>가 틀림없이 마네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에밀 졸라는 클로드의 그림을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으로 묘사했을까? “ 분석적 화가인 마네와 같은 화가들은 대중들이 가장 많이 신경 쓰는 제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대중에게는 제제만이 중요하겠지만, 그들에게 제재란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대중에게 비난을 받을 당시 그를 완강하게 옹호하며 비난한 사람들을 지적한 졸라의 말이다. 이에 마네는 에밀 졸라에게 <에밀 졸라의 초상>을 그려줄 정도로 둘은 친구보다 더 단단한 사이였다. 그러나 고전 회화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세잔은 사물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견고하고 강고한속성과 본질을 강조하고자 고전주의로 다시 돌아갔다.“아, 생명! 생명이여! 그것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 거기서 영원하면서도 변해가는 진실한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그것이 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야!” 클로드 또한 자연의 본연 모습을 찬미하며 자연의 표면이 아닌 깊숙한 곳에 있는 지속성을 포착하려고 했다. 클로드의 과거, 성격, 생각, 고뇌 모두 세잔과 비슷하게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작품을 마네의 것으로 형상하였다. 이는 마음에 들지 않던 친구에게 자신이 원하는 취향과 모습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처럼 억지로 투영한 것이다.
“강력한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우매한 대중을 제압하고, 새로운 세기를 열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 클로드는 새로움을 외치며 기존의 것을 타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중의 취향, 세기의 취향 심지어 친구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인정받지 못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움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보편적인 성공의 강박 속에서 타인의 취향과 입맛에 강요당하며 외롭게 그들과 싸웠다. 결국 그는 성공하지 못할 예술의 굴레 속에서 맴돌았고 이를 멈추기 위해 목을 매달았다. 클로드는 예술을 ‘하려고’ 했다. 자신이 설정한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림을 찢거나 부셨다. <작품>은 클로드의 그림과 그것에 담긴 고뇌의 되풀이, 그리고 그것에 의한 고통스러운 감정 자체이다. 그 고뇌와 고통의 근원은 예술을 할 수 있다는 클로드의 착각이었다. - 각자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 예술은 하는 것이 아니다. 되는 것이다. 프랑스 시네마파크의 아버지, 앙리 랑글루아는 말했다. “영화란 관객이 보지 않으면, 무의미하게 썩어갈 뿐이다.” 그래서 그는 좋든 나쁘든, 오래됐든 아니든, 장르를 불문하고 가능한 모든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영화도, 그림도, 책도, 예술도 누군가 보지 않으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대중의 취향과 입맛에 맞추라는 것이 아니다. 폴 세잔 또한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았지만 피카소와 마티스의 스승이 되었듯, 자신의 작품이 각광을 받지 못하더라도 항상 빛나기에 누군가 그것을 언젠가 알아차리고 대중의 무리 속으로 끄집어 낼 것이다. 대중 또한, 대중과 예술을 매개하는 사람 또한, 예술가 또한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없애거나 무시하지 말고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움과 성공, 인정의 강박에서 벗어나고 취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