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침묵적인 폭력과 사람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려 낸 영화다. 해당 영화는 도달하기 어려운 진실의 실체와 파편적 사실에 기반한 오해를 동일한 사건에 대하는 세 개의 시점 서사를 통해 구현해 냈다. 그 장을 여는 첫 번째 인물은 ‘미나토’의 엄마인 ‘싱글맘 사오리’이다.
제 1장) 아들을 지켜내기 위한 사오리
영화의 걸스 바가 있는 삼 층 건물에 불이 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무언가 대단한 장면을 내포하고 있는 듯한 이 장면은 사실 맥거핀 중 하나일 뿐, 인물의 관점이 바뀌는 기준이 되는 것 외에 영화 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진정한 영화의 시작점은 미나토가 사오리에게 베란다라는 장소에서 ‘돼지 뇌가 이식된 인간이 인간인지’에 관해 묻는 장면이다. 여기서 ‘돼지 뇌’란 '소수', 혹은 '소수자'를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상징이며, 미나토가 처음으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베란다'라는 장소의 특성은 실내와 실외 중간이라는 것, 그리고 벽 없이 앞이 뻥 뚫려 있다는 것이다. 이 장소는 추후 사오리가 미나토의 담당 선생님인 ‘호리 선생’을 마주할 때, 즉 미나토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마주할 때 한 번 더 사용된다.
이후 사오리는 미나토에 관한 부정적 사건을 여럿 목격하거나 옆에서 직접 겪게 된다. 텀블러에는 흙이 가득 차 있고, 얼굴과 귀에 생채기가 났으며, 이상한 동굴에서 ‘괴물은 누구야’라고 말하고 ‘평범한 가족이 될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갑자기 차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에 따라 병원에 간 미나토는 엄마에게 ‘엑스레이 결과를 확인했냐’고 묻고, 자신의 뇌가 돼지 뇌와 바뀌었다고 실토한다. 그동안 미나토의 몸에 상처가 낫던 이유, ‘돼지 뇌’ 등 여러 사건의 중심에 호리 선생이 있음을 알게 된 사오리는 학교로 찾아간다. 이후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뿐, 학교는 사오리의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되는 사오리의 항의에 결국 호리 선생은 사과한 후 학교를 떠난다.
해당 장은 ‘돼지 뇌’에 대한 설명과 여러 사건, 그리고 맥거핀을 통해 제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괴물’이 누구인지 관객들이 추론하게 만드는 장이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이런 ‘괴물 찾기’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제 2장) 호리 선생의 입장은
해당 장의 시작 또한 ‘걸스바’에 불이 난 장면을 호리와 호리의 여자 친구가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호리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그런 요리를 보며 ‘걸스 바’에서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소리친다. ‘호리 선생이 걸스바를 다닌다’는 사실은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문임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1장에서 ‘호리 선생’을 괴물로 만드는 데에는 이런 ‘걸스바에 대한 소문’이 힘을 보탰다. 즉, 관객들은 1장에서 일차원적으로 표현된 사건을 토대로 ‘호리’라는 사람을 얼마나 ‘악’하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해당 장에서는 ‘선천적 결함’으로 인해 뒤집어진 금붕어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뒤집어진 물고기를 보고 여자 친구는 ‘불쌍하다’고 말하며, ‘호리 너와 닮았다’고 서술한다. 요리는 그런 여자 친구의 말에 ‘자기는 불쌍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쌍하지 않다’는 말은 3장에 한 번 더 나오는데, 미나토가 엄마에게 ‘자신은 불쌍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뒤집어진 물고기를 보고 ‘불쌍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에서이다. 뒤집어진 물고기는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과만 보고 ‘불쌍하다’고 함부로 판단한다. 즉, 감독은 해당 장면을 통해 편견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후 사건은 1장에서 호리가 미나토를 괴롭혔다고 보여진 사건을 같은 반 학우인 요리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요리의 시점을 통해 관객들은 사실 호리가 미나토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가하는 등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호리가 궁지에 몰려 억울하게 사과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후 마녀사냥을 하듯 기자가 호리에게 따라붙어 사진 촬영을 하고,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며, 여자 친구는 집을 떠나고, 호리의 집 앞에 돼지의 뇌가 배달되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호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키우던 물고기까지 변기에 흘려보내려고 하나, 결국 물고기를 다시 데려온다. 이 과정에서 호리는 미나토와 동급생이 요리의 ‘장래 희망 글쓰기’가 젖게 된다. 평소 책의 틀린 글씨를 찾아 출판사에 넘기는 취미가 있던 호리는 요리 글에 있는 비문을 체크한다. 그러던 중 호리는 요리 글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이후 그는 미나토의 집으로 달려가 ‘너는 잘못이 없다’고 외치며 사과의 말을 전한다. 그 소리를 들은 사오리는 베란다 문을 열어 호리 선생을 마주하게 되고,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은 아이들을 찾아 나선다.
제 3장) 진정한 괴물은 누구인가?
해당 장은 미나토와 요리, 즉 영화에서 메인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미나토는 반에서 여자아이들과 잘 어울려 다닌다는 등의 이유로 왕따당하는 요리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이후 이들은 서로 친해지지만, 미나토는 자신도 학교에서 요리처럼 따돌림을 당할까 봐 ‘인사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요리를 괴롭히는 행위에 가담하기도 한다. 위태위태한 둘의 관계는 궁지에 몰린 요리를 감싸기 위해 미나토가 신발주머니를 바닥에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등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준 사건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둘은 멈춰진 ‘기차’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아지트를 만들고 서로를 의지하며, 우정이란 감정을 넘어 조금 더 깊은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남자다워야 한다, 남자가 왜 그러냐’고 자주 언급하던 호리 선생,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때까지 돌봐주겠다’고 말하는 사오리, '동성애는 병'이라며 요리에게 폭력을 가하는 요리 아버지의 모습으로 인해 자신들의 감정을 털어놓지 못한다. 어른들의 편견으로 바라보는 이 둘의 모습은 어딘가 위험해 보이기만 한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감정을 키워나가며 산사태가 온 날, 다시 한번 더 자신들의 아지트인 ‘기차’로 향하게 된다.
영화에서 쓰인 ‘기차’의 상징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아지트로 쓰이는 ‘멈춘 기차’와 ‘움직이는 기차’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의 기차는 정해진 목적지를 따라 출발점에서 종착점까지, 그리고 다시 종착점에서 출발점까지 한 바퀴를 이동한다. 정해진 목적지를 따라 한 바퀴를 돌고 멈추는 것. 이는 흔히 말하는 ‘정상 궤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삶과 비슷하다. 초, 중,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에 들어가 취직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이는 영화 속에서 호리 선생이 바라는 삶과 미나토의 엄마인 사오리가 미나토에게 권유하는 삶이다.
하지만 미나토와 요리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평범한 삶’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이들은 엄마 혹은 아빠와 따로 사는 ‘편부모’ 가정이며, 동성애자이다. 사회는 이런 이들을 보며 ‘편부모 가정이라 엄마가 과보호해서 그렇다.’, ‘돼지의 뇌를 이식받았다.’ 등 질책하고, 생채기 내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다. 미나토는 이런 말을 듣고도 ‘자신은 불쌍하지 않다’며 말하지만, 실은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단정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영화는 ‘악인’으로 비쳤던 교장 선생님과 미나토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번 더 관객의 편견을 깬다. 미나토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으며,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기에 자신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누구나 누릴 수 없는 건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단다’라고 말한다.
이후 미나토와 요리는 다시 한번 더 멈춘 기차를 방문하게 되고, 산사태로 인해 무너지는 잔해의 소리를 들으며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라고 말한다. 이들은 기차 바닥의 환풍구를 통해 들판으로 이어지는 하수구를 걸어간다. 마침내 도달한 들판에는 아이들의 동선을 가로막던, 그리고 멈춘 기차를 가로막던 기찻길의 울타리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또한 이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감독은 이런 기차의 특성과 상징을 통해 사회 기저에 만연하게 깔린 ‘소수자’에 대한 편견, ‘소수자는 삶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등의 편견을 상당히 아름다운 방식을 통해 깨부수고 있다.
결말을 두고 ‘아이들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이들과 ‘아이들은 살았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이 팽배하다. 하지만 감독의 말처럼 나는 이들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은 분명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진정한 ‘괴물’은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잘못된 편견으로 ‘괴물 찾기’에 열중했던 우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