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시작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랗고 검은 조개껍데기였다. 난 그것이 정말 소품인 줄 알았다. 조개껍데기 앞에 누군가 앉아 그걸 두드리고 있었고 그 손짓에 맞추어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는 녹음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뿐이고 손의 주인은 곧 일어나 인어 연기를 시작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 조개껍데기가 실은 ‘핸드팬’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엿한 악기이며 지금 실제로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은 극이 중반으로 넘어가고 조개껍데기 음악이 서너 곡쯤 나온 뒤에야 깨달았다. 인어 연기자, 아니 핸드팬 연주자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쭉 연극을 풍성하게 채운다.
연극 <저수지의 인어>의 주인공은 작가 지망생 ‘철수’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아버지 ‘용재’와 단둘이 사는 철수는 온라인 친구 ‘영희’와 습작을 공유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저수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다가 영희의 조언에 힘입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투영한 인어 부자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핸드팬 연주자를 인어 역할 배우라고 착각한 이유와, 내가 이 연극을 보기로 한 이유는 어찌 보면 같은 이유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인어’라는 키워드가 나올 때 기대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고, 그 연출을 연극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이 호기심 해소가 이 연극을 보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연극을 보고 나온 지금은, 그 호기심은 잘 해소되었다. 아주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소되었는데, 동시에 내가 기대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일단 인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저수지에 숨어 사는 인어 부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인어가 물속을 살랑살랑 헤치며 다니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인어가 과거를 회상할 때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그때마저도 공포와 좌절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향같은 바다가 아닌 모든 것을 앗아가는 폭력적인 바다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내가 원하던 ‘인어다운’ 모습을 연극에서 볼 수는 없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내 기대가 긍정적으로 충족되었던 이유는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연극의 매력을 많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수는 메신저를 사이에 두고 영희를 만난다. 용재는 철수가 쓴 소설을 통해 인어 부자를 만난다. 그들은 다른 공간, 심지어는 다른 차원에 있되 같은 순간을 공유한다. 메신저로, 소설로 상대를 마주하면서도 절대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더 가까운 걸지도 모른다. 얼굴조차 모르는 상대는, 얼굴조차 모르기 때문에 타인이 아닌 또 다른 나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더 깊은 공감이 나오고 상대의 변화가 나의 변화로까지 이어진다. 철수는 영희를 보고, 용재는 인어 부자를 보고 변화를 다짐한다.
또한 인어 부자는 철수가 만들어낸 인물이므로 실은 철수가 용재에게 변화를 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순간도 대면한 채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 점 덕분에 어찌 보면 식상한 부자 간의 갈등이 매력적인 스토리로 탄생한 것 같다.
극의 마지막은 미국 록밴드 레너드 스키너드의 ‘Free Bird’가 장식한다. 당신이 ‘나’를 잊는대도, 나는 떠나야만 한다. 내가 봐야 하는 세상이 넓어서, 나는 떠나야만 한다. 자유로운 새처럼, 나는 떠나야만 한다. 나는 변할 수 없다.
‘인어답게’ 살기 위해 떠난 아들인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연극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인어에게 ‘네가 인어지, 복어냐?’와 같은 소리를 듣던 인어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인어다움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든, 바다로 떠나는 그 짧은 설렘이라도 만끽할 수 있다면 그 작은 순간만이라도 충분히 인어답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