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십수 시간이 느린 삶을 살게 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지구 반대편 땅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어째 생활에 대한 감상은 비슷하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 하다못해 과자 봉지에 적힌 광고 한 줄마저 새롭지만 버릇처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말을 곱씹는다. 수 년간의 타지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는 일의 버거움은 이미 뼈저리게 느꼈던 터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질감이 덜하다. 이 기시감은 때로는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오늘처럼 햇볕이 쨍쨍한 날엔 잘 닦아온 노련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 단순한 여행이 아닌 '생활'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 때면 오히려 위안이 된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건, 새로운 것에 대한 감응력보다는 나를 좀먹는 것들을 적당히 음소거해둘 수 있는 무던함이니까. 쉽게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빤히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닳아서 반질반질해진 것도 반짝임이라면 반짝임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는 좀 더 단단해진 생활력을 얻은 대신 생존과 삶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가는구나.
그래도 어디서든 둔탁하게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름의 장점으로 인식하기 위해선, 이곳에서도 예전의 생활을 간간이 불러와야 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최근엔 영화를 두어 편 보러 갔다. 서너 해 전까지 종종 즐겨보던 느낌의 작품들이었다.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연인들의 이야기, 관계와 감정의 섬세한 굴곡을 짚어내려가는 이야기. 한 편은 영어 자막과 함께 보고, 다른 한 편은 그마저도 없이 무작정 달려들듯 보았다. 전자는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표정과 분위기로 세상을 읽어내야 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간간이 들리는 단어들, 다른 관객들의 반응, 스크린 속 인물들의 눈빛과 제스처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통해 눈 앞에 드밀어진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어쩌면 이곳에서의 생활과도 닮아있었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을 땐 웃어넘기고, 말보단 눈치와 행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일반적인 사회 성원처럼 보이기 위해 필요한 암묵적 합의 그리고 관행들을 하나하나 물어 익혀나가는 일. 그걸 인식하니 지금까지의 기시감이 조금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지겨움이 아니라, 당연했던 세상을 낱낱이 뜯어보고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가령 이런 일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만, 의식하고 들여다보면 영화관에 무사히 입장하기까지도 꽤나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익숙한 한글 지도가 아닌 구글 맵에서 영화관이 아닌 'theater'를 검색하고, 보고 싶은 영화의 영어 제목을 찾아서 예매 버튼을 눌렀다. 상영관은 2층에 있다는 통상적인 안내를 알아듣기 위해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지정석이 따로 없는 낯선 관습 속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전체적인 과정은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엄청난 어려움은 없었지만, 약간의 변주를 통해 이것이 숱한 학습과 합의, 의식적 선택을 통해 이뤄지는 행위라는 걸 새삼스레 자각했다.
그러니까, 많은 것을 익숙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금의 나는 한순간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선의와 호의, 그리고 약간의 민망함과 거리낌...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나라는 사람의 구조를 갖춰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각 부분들을 정밀히 관찰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게 아닐까 싶었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그것들을 다듬어나가기 위해선 여태껏 쌓아온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노력이 필요할 터다. 어쩌면 더욱 험난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앞으로가 어떻든, 내가 몰두할 수 있는 대상에 스스로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은 더없이 기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외로운 순간들이었으니까.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더없이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