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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편혜영의 「호텔 창문」은 제 13회 김유정 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편혜영의 여섯 번째 단편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문학동네, 2021)에 수록된 작품이다.

 

 

- 『어쩌면 스무 번』은 지난 5년간 발표한 단편들 중 낯선 곳에 도착한 사람들 이야기, 그런 느낌이 나는 작품을 모았습니다.

 

- 『어쩌면 스무 번』도 대부분의 상황은 무섭죠. 그런데 쓰다가 소설 속의 인물을 보면서 이 사람도 되게 애를 써서 살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소설들은 인물들에게 무섭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주기보다 그들의 사연을 많이 들으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소설을 묶으면서 보니까 실패했지만 그래도 애를 써서 살아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런 사람들 이야기여서 더 무섭게만 쓰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 저는 소설을 쓸 때, 지진에 비유하자면 강진처럼 아주 크나큰 지진이 일어나 모두가 다 노골적인 파국을 맞는 이야기보다는 아주 미약한 여진 같은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흔들렸는지 의심도 하게 되고, 나는 안 흔들렸다고 생각하는데 옆에서 방금 되게 흔들렸다고 말하면 ‘흔들렸나보다’ 하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에요.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미세하게 계속 흔들림을 주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 같아요.

 

[책읽아웃] 아주 미약한 여진 같은 이야기, 『오은의 옹기종기』 180회 中

 

 

이 이야기는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실패했지만 그래도 애를 써서 살아보는 사람, 운오의 이야기이다.

 

 

 

1. 피해자에게 부여되는 책임감


 

운오는 큰어머니에게서 늘 어떠한 책임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어릴 때에는 “운오를 믿고 보내주겠다(7p)”며 형의 무리를 감시하듯 운오를 붙여 보냈으며, 형이 죽은 현재에는 형 대신 살아있음에 죄책감을 가질 것을 강요받는다.

 

운규의 사고 경위는 소설 내에서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고 이후, 운오는 집안의 속죄양이 되어 모든 죄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제삿날 상 위에 올려둔 가족사진은 마치 이 부부가 형이 죽은 후 함께 죽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운오가 살아남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 큰어머니 운오에 대한 원망을 어떻게든 표출하며 그가 살아 꾸려낸 세계를 망가뜨린다.

 

큰집에서의 제사는 운규를 그리기 위해서가 아닌, 운오를 원망하고 그가 살아있음에 죄의식을 부여하는 자리이다.

 

운규가 죽고 나서 운오는 그저 악인이었던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포장되는 것에 거북함과 위화감을 느낀다.

 

운오의 아버지는 회삿돈을 횡령하면서까지 큰집을 돕는다. 그러나 운규를 의사자로 지정하고, 운오가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경찰은 정작 사고 당일, 무대를 구경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 소거된 기호


  

 

화재로 인한 사망자보다 길거리를 보행하다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뱀이 테러리스트보다 위험하다고도 얘기해줬다. 숨이 찼지만 쉬지 않았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멈춰선 것도 개의치 않았다. 내친김에 상어 보다 나무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코코넛을 조심하는 게 낫다는 얘기도 했다. 그는 별난 농담이라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역에서 그와 헤어질 때까지 운오는 이건 농담이 아니고, 확률적으로 보통 그렇게 되기 마련인 얘기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편혜영, 호텔 창문 24p 中

 

 

그는 역에 도착하자마자 잠시나마 제사를 지연하기 위해 “특별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9p)” 음식을 고른다. 운오가 음식을 고르는 기준에서조차 그의 개인적인 기호는 소거된다.

 

운오는 사고 이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상황에 대해 수많은 정보를 수집한 듯하다.

 

그러나 운오가 정보를 모으는 기준은 단순히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다. A가 좀 더 위험해 보이지만, 사실 정말 위험한 것은 B라는 도식의 상황이다.

 

이러한 형식으로 생사의 확률과 기로를 모으는 운오의 행적은 운규가 죽은 이유가 언뜻 운오를 살리는 일 때문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은 듯 보인다. 

 

호텔 화재 현장에서 선뜻 건넨 말이 일파만파 전해져 의도치 않게 확정이 돼버리고 누군가가 또다시 자신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는 사실 때문에 운오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다른 죄책감이, 그의 삶에 더 끼어들기 전 운오는 당장 전화기를 꺼버림으로써 자신을 옥죄어 오던 죄책감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3. 그저 확률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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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오가 제사에 가지 않는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남자를 찾아가지만,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현장에 있었으나 죄책감이 강요되지 않은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

 

남자는 운오에게 형보다도 먼저 죽음의 이미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이어질 것 같지 않던 인연은 호텔의 화재 사건으로 한 번 더 묶이게 된다.

 

남자는 자신이 기억하는 방식대로의 운규를 운오에게 들려준다. 운오에게 운규는 못된 형이었을 뿐이고, 큰어머니에게 운규는 운오 때문에 죽어버린 안타까운 아들이지만, 남자에게 운규는 그저 넉살 좋은 일찍 죽어버린 친구였다.

 

그가 떠벌리는 실패로 점철된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 운오는 그가 부럽다고 느낀다. 죄책감이 강요되지 않았기에, 그의 인생에는 운규가 더 이상 끼어들 일이 없고 사람이 죽어나간 화재 현장을 제 실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남자가 공장 화재 사건에서 오히려 현장을 잡아냈음에도 범인으로 몰려 잘린 이야기를 들으며, 운오는 그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게 된다. 차라리 자신이 범인이라고 믿는 것이 더 마음 편하고 후련하다는 그의 태도에 운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위로를 건넨다.

 

사고란 그저 확률적인 문제라고.

 

 

 

4. 그래도 애써 살아보는 것


  

 

큰어머니는 자주 형의 이름으로 운오를 불렀다. 운오가 끝내 쳐다 보지 않으면 늙은이의 실수인 척 과장되게 자책했지만 다음에도 형의 이름으로 운오를 불렀다. 큰어머니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운오는 형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그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운오는 오로지 그 사실을 알기 위해 나이를 먹은 기분이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싶을 때가 많았다.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도그랬고 양갈비를 처음 먹었을 때,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대학 때 배낭여행으로 간 폼페이에서 죽음의 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미라를 볼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살아있는 게 너무 당연해서 무턱대고 환희나 기쁨에 홀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질 때가 있었다.

 

편혜영, 호텔 창문 17p 中

 

 

운오는 속죄양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삶답게 살아보고자 노력한다.

 

“살아있다는 건 다행일 때도 있지만 조금 더 살았다는 게 별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는 운오지만, 그는 사고로 인한 물에 대한 트라우마도 극복해 내고, 폼페이에서 죽음의 순간을 관람하기도 한다.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수많은 경로를 수집한 것 역시, 운오 스스로가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노력이다.

 

죽음과 삶을 재정의하고 누구나 쉽게 죽을 수 있다, 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운오에게 있어 가장 큰 위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운오는 강요된 죄의식에 차라리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믿어버리는 남자에게 위로를 건네고자, 여태까지 자신이 수집해 온 정보를 쏟아낸다.

 

애써 위로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운오의 모습이 「호텔 창문」의 결말에서 뜨거움이 아닌, 따뜻한 온도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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