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존재하는 나라에 사는 것은 큰 행운이다. 길가에 펼쳐진 벚꽃길과 푸른 나무, 알록달록한 낙엽과 하얗게 쌓인 눈을 비행기를 타지 않고 동네에서 마주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특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해외에서 처음 눈을 본 순간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던 브라질 친구와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원래 겨울을 싫어했다. 패딩과 목도리로 무장을 해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의 오싹함은 매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전만큼 겨울을 싫어하지 않게 된 이유는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재미를 찾으면서부터다.
계절별로 다른 것은 날씨와 풍경만이 아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음식이나 작품, 추억이 있다. 첫눈 예보가 뜨기도전부터 슬그머니 역주행을 시작하는 엑소의 ‘첫눈’이나 크리스마스의 상징과도 같은 ‘나 홀로 집에’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중에서도 내가 겨울을 조금이나마 좋아하게 만들어 준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해보려 한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강원도 한 마을에서 ‘굿나잇 책방’을 운영하는 은섭과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해원의 이야기를 담은 로맨스 소설이다. 작년 겨울,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각난다.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으로 두고 충실히 로맨스에 집중한 소설은 참 오랜만이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둘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뒷 내용이 궁금해 빨리 읽고 싶으면서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맘에 드는 장면을 몇 번이고 곱씹어가며 읽었다.
H 전부터 궁금했어. 굿나잇 클럽 회원은 무슨 일을 해야 해?
葉 그냥,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인사를 주고받는 일.
H 너무 간단한 거 아냐? 굿나잇- 이렇게?
葉 응.
H 굿나잇.
葉 굿나잇.
이 책의 또 다른 재미 요소는 주인공 은섭이 쓰는 비공개 책방 일지다. 세상 곳곳의 야행성 사람들이 회원인 가상의 굿나잇 클럽 사람들에게 전하는 혼자만의 일기를 엿보며 그가 어떤 마음으로 해원을 기다렸는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2023년, 주인공 은섭처럼 본인만의 독립출판을 시작한 이도우 작가가 새롭게 출간한 양장본에는 은섭이 쓴 굿나잇 책방의 책방일지가 부록으로 실려있으니 꼭 보기를 추천한다.
굿나잇 클럽 여러분.
이 클럽을 오래 했을 때의 진짜 좋은 점을 제가 얘기했나요?
수많은 굿나잇을 넘어 굿모닝-하고 인사할 때,
잊고 있던 설렘이 아침 햇살처럼 쏟아진다는 것.
아침은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굿모닝.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동명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으나, 은섭 역의 서강준과 해원 역의 박민영 배우는 내가 생각한 은섭과 해원의 이미지와 꼭 어울린다. 그러니 책에 더욱 빠져들고 싶다면 두 배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언젠가 강원도 어딘가에 실존할 것만 같은 굿나잇 책방을 찾아 꼭 한번 여행을 떠나고 싶다.
Happy Christmas, Harry
우리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그리 중요한 명절이 아니지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괜히 기분이 들뜨곤 한다. 거리 곳곳의 화려한 트리들은 추운 칼바람과 두꺼운 패딩 틈에서 외출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만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크리스마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해리 포터> 시리즈다. 시리즈물인 만큼 영화 속 시간적 배경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호그와트를 생각하면 눈에 새하얗게 뒤덮인 전경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연회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엄마가 짜준 스웨터를 입은 꼬마 론과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는 해리. 해리포터 속 크리스마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마법사의 돌’만큼은 꼭 다시 찾아보곤 한다. 호그와트 입학 전까지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즐겨본 적 없는 해리의 눈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화려한 장식들, 푸짐한 음식으로 가득한 호그와트 대연회장의 모습은 아마 천국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나 역시 매우 두근거리는 심정이었으니 말이다.
겨울의 상징, 캐럴송
첫눈 예보가 뜨고 12월에 들어서면 역주행을 시작하는 노래들이 있다.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엑소의 ‘첫눈’과 같은 캐럴송들이 거리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겨울이구나를 실감한다. 같은 노래인데도 겨울에 들으면 더욱 설레고 몽글몽글한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 새삼스레 신기하다.
내가 캐럴송을 더욱 특별하게 느끼게 된 건, 그룹 더보이즈를 좋아하면서부터다. 12월 6일, 추운 겨울에 데뷔한 더보이즈는 매년 데뷔일에 맞춰 겨울 노래를 발매하고 있다. 리메이크 곡에서부터 밝은 파티 분위기의 노래, 포근한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같은 캐롤송임에도 종류가 다양해 올해는 어떤 노래가 나올까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매년 12월을 기다리게 되었다.
꼭 특정 가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좋아하는 캐럴송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캐럴송이 좋은 이유는 하나같이 겨울의 포근함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날씨와 반대되는 따듯한 가사를 듣다 보면 신기하게도 겨울이 조금이나마 따스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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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했던 것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된다는 건 매우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때때로 매우 작은 이유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게는 겨울이 그런 존재다. 단지 재밌게 읽은 작품의 배경이 겨울이고 좋아하는 가수가 겨울마다 캐럴송을 발매한다는 이유로, 거의 평생을 싫어했던 겨울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물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겨울이 오는 것이 여전히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귀에 꽂은 이어폰 속 캐럴송에서 흘러나오는 트리 장식과 흰 눈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찬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걷는 일이 조금이나마 즐겁게 느껴진다. 그러니 꼭 겨울이 아니더라도 싫어하는 계절이 있다면, 그 계절을 좋아할 작은 이유를 만들어보자. 좋으나 싫으나 1년에 한번은 겪어야 할 계절이라면,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내는 편이 좋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