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지의 세계를 향해 - 도서 '호라이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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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살갗을 바꾸는 일이다.”
책 읽기를 끝마칠 때마다,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극장을 나설 때마다, 영화를 보기 전과는 다른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음을 실감한다.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데려간다고 믿는다. 때로는 새로운 종류의 감정에 눈뜨게 만들고, 때로는 나를 둘러싼 외부의 것들을 감각하는 방식을 바꿔 놓기도 한다. 책과 영화는 그렇게 나를 변화시킨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짧든 길든 한 지역이나 한 국가를 여행할 때마다 우리는 변화한다. 여행은 우리의 경험부터 감정, 감각, 관계, 배움, 그리고 기억까지 많은 것들을 바꿔 놓는다. 대단하고 거창한 여행을 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 다른 장소를 체험할 때마다 다른 내가 되는 경험을 한다. 첫 템플스테이는 새벽 4시 음성의 산 공기를 알려주었고, 첫 일본 여행은 13년 지기 친구와의 관계를 더욱 평온하고 견고하게 다져주었다. 또 미국 여행 중 투어 차를 타고 그랜드 캐니언을 만나러 가던 길, 차에서 잠시 내려 돌바닥에 드러누운 채 온몸 위로 쏟아지는 별을 보던 새벽을 기억한다. 이제 더 이상 그 순간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고작 세 개의 국가만을 경험해 본 나에게도 여행이 가져다준 변화를 나열하라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텐데, 평생 동안 약 일흔 개의 나라를 여행한 배리 로페즈는 얼마만큼의 변화를 경험했을까. 북태평양 동부 연안, 캐나다 북극권, 갈라파고스 제도, 아프리카 케냐,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 그리고 남극까지.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던 그의 여정과 변화가 궁금했다.
그래서 책 ‘호라이즌’을 펼쳤다. 호라이즌은 작가이자 여행가인 배리 로페즈가 자신의 여행 경험을 집대성한 에세이로,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집필한 장편의 논픽션이기도 하다. 생생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써 내려간 여행기를 곱씹으며 그가 본 세계의 일부를 경험했다. 각 여행 전후로 그의 열망과 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감각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떠나 그가 밟고 지나간 흔적을 따라 걷고 싶다고.
그 주변의 풍경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나는 그 색깔을 알고 싶었고 근처에는 어떤 종의 풀과 나무가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곳의 흙은 내 발의 압력 아래서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새들이 날아다닐까?
그 새들은 어떤 나무에서 날아오르고 어떤 음조의 소리를 낼까?
- 본문 69p.
배리 로페즈의 호기심을 찬찬히 뒤따라가며 그가 경험한 ‘감정의 변화’에 숱하게 몰입했다. 여행지와 자연에서 만난 사람들, 토착민들, 동식물들뿐 아니라 유적지, 시설물, 그리고 심지어는 작은 조각이나 탄피 하나하나까지. 그들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꺼이 경청하고, 궁금해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그의 태도가 미덥게 느껴졌다. 그가 목격한 경관과 그가 겪은 감정의 변화를 함께 경험하고, 그 감각을 기억 속에 붙잡아 두고 싶게 만드는 순간들을 여럿 만났다.
먼저 온화한 날씨의 보타니베이. ‘무리 지어 흰 뭉게구름 앞을 가로지르던 분홍 앵무들이 파란 하늘로 날아가니 갑자기 검게 보이’던 모습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발견했다는 순간이 새삼스럽게 신비로웠다. ‘이따금 보이는 새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고래를 관찰하고, 수면에서 노니는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행위에서도 그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 특별한 광경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안온한 공기와 따뜻한 햇볕 속에서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평온한 세계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사랑을 감각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제도. ‘갈라파고스의 작은 두 플라사섬 근처 고든락스의 얕은 물속에 들어가 색이 화려한 열대어들의 거대한 무리와 처음으로 정면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느낀 흥분을 공유하길 원했다. 무언가에 강렬하게 압도된다는 기분은 쉬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한 몸처럼 일제히 몸을 돌리며 멀어지는 물고기들의 엄청난 수 자체’에서 발견한 생명의 기적에 그와 함께 압도되고 싶었다. 갈라파고스가 선물해 준 생명의 다양함과 광범위함, 그로 인해 처음 겪어보는 수준의 경이를 만난 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사랑과 경이의 감정뿐 아니라 그가 경험한 슬픔마저 소중히 느껴지는 순간들도 많았다. 특히 북극권 소형 도구 문화 유적 앞에서 느낀 서글픈 감정에 크게 공감했다. ‘바람의 힘에 조금이라도 대항해 보려고 능숙하게 배열한 몇 개의 돌, 연필보다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가 타고 남은 흔적이 있는 아궁이 터.’ 현재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에서 살았던 과거 사람들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은, 그들의 녹록지 않은 삶을 상상하게 하고 감정을 이입하도록 만든다. 고통과 감내로 연결된 과거와 현재를 체감하는 기분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어느 문화 안에서 살고 있든 우리만 옳다고 고집한다면,
따라서 우리가 보통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에 관해 논의할 마음도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 것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인간의 다양성을 계속 두려워한다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 바로 우리 스스로 자신의 치명적 숙적이 될 가능성만 더욱 커질 뿐이다.
- 본문 86p.
배리 로페즈가 겪은 감정의 변화를 지나, 이내 배움의 변화에 몰두했다. 그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탐구하며 얻은 가장 큰 변화이자 깨달음은 ‘협력의 필요성’인 듯하다. 서로 다른 인간 사이의 협력은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협력 역시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다양성, 동물의 다양성, 식물의 다양성, 그러니까 생명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만과 이기의 틀 안에 줄곧 갇혀 산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성을 무시하고 ‘무엇이든 새로운 곳에서 발견한 것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려는 욕망’에 매몰되어 산다면. 인류의 운명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살갗으로 느꼈으니까.
파울웨더곶에서 야영하던 때, 그가 느낀 쓸쓸함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개벌지에서 보이는 무차별적이고 탐욕스러운 채취의 증거, 이를테면 거대한 나무들이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것처럼 뿌리 뽑혀 있는 모습과 산업적 벌목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 타고 남은 재와 곤죽이 된 토양’의 잔상을 그려본다. 눈앞의 이익을 좇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야 할 터전을 착취하는 우매한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무관심한 자연의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덮쳐올지 모른다는 그의 두려움을 깊이 이해한다.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 경험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누구나 매일같이 헤쳐 나가야 하는 감정적 얽힘’에서 잠시 도피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도 물론 가치가 크다. 그러나 여행의 진가는 저마다 다른 삶의 자취와 앎의 방식을 몸소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에 존재했던 수많은 죽음, 폭력, 약탈의 흔적을 감각하거나, 이때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 이해와 협력의 태도를, 그 필요성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된다.
‘수평선은 지도 제작자의 문턱이었고, 미지의 가장자리였다.’ 배리 로페즈에게 여행은 수평선, 즉 미지의 가장자리를 넘으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들의 가장자리를 넘고 또 넘어 인간과, 자연과, 지구를 이해해 보려는 도전이었다. 변화와 반추와 통찰을 수없이 반복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그 기나긴 여정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읽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바꿔 놓는다. 이 책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을 미지의 가장자리 앞으로 데려다 놓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박지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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