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피스] 호수 저편에 있는 것을 끌어올리는 그림, 작가 호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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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호수에 잠겨있는 것들을 그려 꺼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호수
- 안녕하세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호수입니다. 제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상 "저는 호수 속에 있는 것을 그립니다"라는 말을 전하곤 합니다.
한 번은 건강검진을 받던 중 제 혈압이 55/85라는 수치를 기록한 적이 있었어요.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한 친구가 "너의 몸은 잔잔한 호수 같구나."라고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어, 제 활동명도 '호수'로 짓게 되었고, 제 작품 세계도 호수를 바탕으로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림을 그릴 때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그립니다. 그저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게 전부죠. 하지만 제 작품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각자의 시각으로 "이 그림은 이런 의미인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하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저에게 아무 의미 없던 그림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담아 재탄생하는 과정이 참 기쁘거든요.
그래서 호수가 있는 공간을 떠올리며 저는 스스로를 호숫가에 있는 크레인이라고 정의합니다. 호수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 끌어올린 것들은 버려진 자동차일 수도, 보석일 수도, 괴물일 수도 있어요. 저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끌어올려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로 인해 여러분이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제가 끌어올린 것들을 각자의 의미로 해석해 주시면, 저는 다시 그릴 힘을 얻습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순환 구조 속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처음 그림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먼저 여쭙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종종 교과서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곤 했잖아요. 저도 그 중 하나였어요. 하하. 그래서 그 당시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과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죠. 자연스럽게 그림은 제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시절, 저와 비교적 교류가 많았던 교수님께서 제 작업을 보시고 "너는 나중에 작가로 활동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때까지 저는 '작가'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어요. 그저 그림을 그리면 화가나 만화가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그 말을 계기로 일러스트 작가라는 영역을 알게 되었고, 활동 중인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분들이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가면서 일러스트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저도 언젠가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내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죠.
지금의 저는 낮에는 디자이너로 일하고, 밤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을 그리며 제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낮과 밤, 디자인과 일러스트 작업을 함께 진행한다는 것이 참 놀라워요. 매일 두 분야의 작업을 동시에 하다보면 그 차이점도 명확하게 느껴질 것 같은데. 작가님께서 느끼시는 디자인과 일러스트의 차이점이 일러스트 활동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을까요?
현재 저는 낮에는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낮과 밤에 번갈아 가며 작업을 하다 보니 디자인과 일러스트의 차이를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러스트의 경우, 제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그려도 그 사용자가 명확하게 존재해요. 일러스트는 스티커나 엽서 등으로 출력하여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소비자가 이렇게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용자가 생겨요.
하지만 디자인은 달라요. 제가 무언가를 마음껏 표현하기보다는 소비자들의 사용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니까요. 제 개인적인 취향이나 생각보다는 팀원들과의 협업이나 자료 조사를 통해 얻어진 지식이 디자인의 바탕이 되어요.
저는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아요.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는 제 고집을 줄이는 방법을 익혔고, 일러스트 작업을 하며 제 방향성을 확고히 하여 표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특히 일러스트에서 제가 고수했던 고집은 ‘그로테스크함’이었어요. 터져 나오는 듯한, 소위 고어스러운 장면들을 선호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스타일이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제 그림에는 분명한 스타일이 담겨 있어요. 만약 디자인에서처럼 타인을 고려하며 일러스트를 그렸다면, 그때처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디자인에서 타인과 조율하는 법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일러스트에서만큼은 제가 그리고 싶었던 스타일을 확고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병행하면서 그 차이를 느끼고, 제가 나아가야 하는 두 방향을 동시에 경험하며 적절히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 낮과 밤 모두 작업 활동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체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힘들었던 적은 없었을까요?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사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말씀을 드리다 보면 종종 다른 분들께서 ‘힘들 것 같다’, ‘부지런하다’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하하.
하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러스트를 이어나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 뿐이에요. 일러스트를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저의 삶을 이어나가야 하잖아요. 어떻게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지금의 생활이고, 현재의 작업 방식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서 힘들다는 생각은 그닥 들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의 호수에는 무엇이 가라앉아 있나요? 호수의 일러스트
- 작가님의 작품관을 확립할 수 있었던 하나의 메인 작품을 소개해 주신다면.
저는 [캔들라이트(Candlelight)]라는 작품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이 작업이 제가 이어나가야 하는 작업의 정체성을 잘 정립시켜준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작품은 2023년 4월에 ‘반짝이는 불빛에 잠에서 깬다 / 나는 이 불빛을 봄이라고 부른다’라는 이야기와 함께 올렸던 그림이에요. 약 한 달 반에 걸쳐 목련이 피고 지던 시기에 그렸던 그림인데,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가 한창 취업 준비 시즌이었어요.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 시기의 저는 산출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헛도는 바퀴처럼 지낸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꼈어요. 디자인도, 일러스트도 모두 불만족스러웠죠.
뿐만 아니라 사실 저는 이전까지는 작업에 대한 만족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어요. 어째서였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전의 작품들을 볼 때이면 놀이공원 한가운데에서 고함을 치는 것처럼,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흘러 문득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굉장히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디론가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 작업을 마치고, 처음으로 저의 작품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 작품은 어떻게 그려야 제가 그림을 그리며 즐겁고 편안할지, 시간적, 정신적 측면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얻은 해답과도 같은 작품이에요. 동시에 '내가 이런 색도 쓸 수 있구나'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죠. 내가 원하는 방향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색을 사용하고, 어떤 묘사를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그리고 ‘그래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면 되는구나’ 용기를 얻을 수 있었어요. 결국 어느 정도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 뿐만 아니라, 그 힘까지 얻을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 작품을 완성한 후, 저는 해당 작품을 바탕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가고 있어요. 이 그림을 그린 지 벌써 1년 반이 넘었지만, 여전히 참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 정말 의미가 깊은 작품이네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현실적인 것 같다는 느낌도 묻어나는데, 앞서 소개해 주셨을 때처럼 작가님께서는 특별한 스토리나 의미를 담지 않고 그림을 그리신 것일까요?
맞아요. 저는 항상 그림을 그릴 때 "여기서 이런 것이 나오면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이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는, 나중에 금속 공예 같은 입체 조형물을 만들어 볼 수 있다면 이런 형태의 나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당장 조형 작업을 하기는 어려우니 그림으로 먼저 표현해보기로 했죠. 나무를 그린 후에는 꽃도 양초 모양으로 그려서 조형적인 요소를 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양초꽃이 핀 나무를 그리게 된 거예요. 나중에 조형 작업을 하시는 지인에게 제 그림을 보여드리며 "실제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라고 여쭤봤더니, 수 백만 원 가량의 견적이 나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 마음과 그림 속에만 그 모습이 담기기로 했습니다. 하하. 이와 같이 저의 그림은 '이걸 갖고 싶다', '이런걸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 작가님께서는 큰 의미를 담지 않는다고 해주셨지만, 말씀해 주신 것처럼 보는 이들은 작가님의 작품에서 많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Firework]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깊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었고, 사실 마음 속으로 이미 몇 개의 스토리를 떠올려놓은 상태거든요. 하하. 그래서 오늘 꼭 작가님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이야기가 저의 몫이라면, 작가님께서 해당 작품을 그리게 된 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Firework]는 NFT 작가님들과 함께하는 그룹에서 어반브레이크에서 단체전을 진행하며 제작했던 작업이에요. 그런데 그 단체전의 주제가 바로 ‘페스티벌’, 즉 축제였죠. 일반적으로 축제라고 함은 즐겁고 신나는 느낌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그 당시의 저는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를 그리기에는 너무 삶이 고단했던 때였어요. 하하. 그렇다면 인간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존재의 즐거움이라도 표현을 해보자 생각하게 되었죠.
어떤 존재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는데, 제가 예전에 작업했던 작품 중 <질병의 계절>이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그 작품도 질병을 굉장히 아름답게 표현한, 질병의 미화 작품이었거든요. 그 작품에서 생각이 파생되어, 이번에도 질병을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질병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에서 벌어지는 미생물의 축제라고 생각해요. 마침 그 당시 제가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항상 보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드라마에서는 해치워야 하는 존재가 젤리의 형태로 표현이 되죠. 그것을 보니까 ‘내가 질병에 걸렸을 때, 나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나의 몸속에 있는 이 세포들, 질병들은 젤리같은 형상을 하며 신나고 즐겁게 축제를 벌이고 있겠구나’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그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던 작품이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영역은 그림은 항상 밀접하게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경우에는 반려동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님의 반려묘가 담긴 <펫로스 증후군> 시리즈의 작품에는, 작가님의 마음이 담길 수 밖에 없는데.
맞아요. 저의 반려동물이 떠난 후 작업한 <펫로스 증후군 시리즈>는 제 감정을 정리해 준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이에요. 반려동물이 떠나고 정말 슬펐지만, 그럼에도 저는 제 할 일을 해야 했어요. 겨울이었고, 베란다에 그 친구를 뉘어 놓고 매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작업을 했죠. 그 고양이 옆에서 기대어 혼자만의 이야기를 읊조리기도 하고, 다시 작업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 아이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니,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시 한 번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 아이와 함께 살면서는 저를 서열 밖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확실히 느꼈거든요. 하하. 예를 들어 가족들이 함께 있을 때는 절대 저에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저에게 올 때는 오직 밥이 먹고 싶을 때뿐이었죠. 그래서 이렇게까지 마음에 그 아이가 깊이 들어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소중했고, 사랑했어요. 때문에 제 슬픔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썼던 일기 중 몇 가지를 발췌해 작업을 시작한 것이 바로 <펫로스 증후군> 시리즈였어요. 그 아이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려 놓으니, 저에게도 좋은 작업이 되었고, 펫로스 증후군으로 힘들어하는 다른 분들께서도 많은 공감을 해주셨어요. 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던 작업이기도 합니다.
- [펫로스 증후군] 시리즈 중에서도 작가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펫로스 증후군]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화장]을 가장 좋아해요.
이 작업의 바탕이 되는 일기는 제가 쓴 가장 긴 일기이기도 하고, 제가 고양이를 화장하러 갔을 때 느꼈던 감정이 이 작품에 온전히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흡연자지만 헤비스모커는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일주일에 한 갑을 훌쩍 피웠어요. 그런데 고양이가 화장되는 모습을 보니, 그때 피웠던 담배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었어요.
- 슬픔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굉장히 색이 다채로워서 따뜻한 느낌도 든다는 것이 참 좋아요.
이때 저희 고양이를 처음 구조해주시고, 저희에게 믿고 맡겨주셨던 구조자님께서 장례식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어요. 그분과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 친구 덕분에, 저는 살면서 보지 못했을 인연도 만나게 된 거잖아요. 그렇게 함께 그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그 친구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슬픔만 느껴지진 않더라고요.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은 오직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니까요. 이 친구가 남겨주었던 다채로운 세계를 담고자 했습니다.
- 앞서 옛날의 작업과 최근의 작업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예전에는 더욱 고어틱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고 해주셨는데, 앞서 언급해 주신 [질병의 계절]을 보아도 그 전의 느낌이 확실하게 드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가 있다면.
예전 작업과 지금 작업에 대해 친구가 "너는 예전 작업은 한껏 터져있는데, 현재는 한없이 꾸덕꾸덕하고 음울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하. 이 변화는 제 취향의 변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영화로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에일리언] 시리즈를 선호했지만, 최근에는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과거에는 징그럽고 잔인한 것에 대한 내성이 굉장히 높았던 반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면서 제 취향이 변화했고, 그 변화가 자연스럽게 제 그림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예전 작업의 어두운 느낌을 지금은 최대한 절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울하기까지 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여전히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최근에는 조금 더 다양한 분위기와 감정을 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호수 속에 있는 것들을 끌어올린다고 했는데, 작가님께서는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끌어올리고 싶으신 것이 있나요? 이와 연관되어 지금까지 들었던 감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감상이 있다면.
저는 특정하게 끌어올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어요. 그저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것을 그릴 뿐이에요.
제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시즌에, 귀가 여러 개인 작품 [피해의식에 대해]를 제작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그저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에게는 작은 이야기도 너무 날카롭게 들려오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렸던 것뿐이죠.
그런데 다른 분들께서 그 그림을 보고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귀가 많으니까 평소에도 소리를 듣는 것이 힘들겠다’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세요. 하하. 그런 이야기가 저는 굉장히 재미있어요.
또, [청룡의 해]도 굉장히 인상 깊은 감상평을 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 작품은 제가 용의 해를 축하하며 주변 지인분들께 나눠드리는 연하장에 쓰인 그림이에요. 앞면에는 청룡의 그림을 담고, 뒷면에는 문구를 적었죠. 그런데 그때 제가 드렸던 엽서를 받고, 지인 중 한 분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문구가 기억이 안 나거든요.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애를 써도 어떤 문구를 연하장에 기록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결국 누군가는 저의 작품과 저의 말이 담긴 엽서 한 장에 위로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기억이 정말 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 한국적인 느낌이 강한 것도 작가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Candlelight]와 [청룡의 해]에서 유독 그 느낌이 도드라지는 것 같습니다. 원래 전통성이 강한 느낌을 선호하셨던 것일까요?
아뇨, 전혀요. 하하. 예전 그림들을 보았을 때, 저의 담당 교수님께서 저의 그림을 보고 ‘왜색이 짙은 그림을 그린다’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사실에 굉장히 놀랐거든요. 저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렸을 뿐이었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렇다면 한국적인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에 대해서 궁금해졌어요. 모름지기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인 만큼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한국적인 그림을 찾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건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한국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구나’ 다양하게 공부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공부 한 내용을 제 그림에 반영을 많이 안 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워낙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제가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요. 그런데 다들 ‘동양적이다’, ‘한국적이다’ 이야기를 해주셔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 작가의 마음 속 그림이 갖고 있는 깊이를 함께 봅니다
- 작가님께 그림이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저에게 그림이란 애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그림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다른 것들의 레벨이 애매할 때, 그림의 레벨만 우뚝 높게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자연스럽게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저의 그림을 밖에 내놓고,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과 함께 보고 나니 평균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세상에는 잘 그리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때 정말 그림을 그리기가 싫어졌어요. 거기다 저는 혼자 돌아다니다 어디 앉아서 그림 그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게 반복되다 보니까 그림에 대한 발전은 없고, 그저 ‘돌아다니다 그린다’는 그 행위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굉장한 회의감이 들었죠.
그런데 그렇게 회의감이 들면서도 그림을 도저히 놓을 수는 없었어요. 팔은 결국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도대체 그림이라는 것은 뭐길래 나를 이렇게까지 하게 할까’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림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1순위가 된 것 같아요.
그림은 제가 생각하는 바를 잘 꺼내놓을 수가 있고, 그 결과물도 만족스러워요. 그래서 저는 저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말을 잘 하지도 못하거든요. 하하. 글을 써도 나중에 제가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싶을 때가 있는데, 그림은 나중에 보면 그 당시 제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한눈에 알 수가 있어요. 저 스스로에게 설명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이라는 수단이 정말 좋습니다.
또, 저는 제 가족들이 저의 그림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이전까지는 전혀 못했어요. 저의 가족들은 저의 옛날,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많았던 그림을 볼 때 항상 ‘이상한 그림이다’라고만 이야기하고 넘겼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의 그림을 보고 굉장히 좋아해 주니까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특히 공모전을 위해 그렸던 반려묘의 그림을 정말 좋아해 줬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저에게 그림은 언제 또 그릴 것인지, 다음 그림은 언제 완성되는지 물어보며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림은 저에게 오히려, 제가 먼저 자랑하고 싶은 저의 반짝이는 보석이라고 생각해요.
- 오래 그림을 그려온 만큼 작가님 안에서 그림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더욱 소중히 자리잡고 확립된 것 같아요. 정말 단단해진 것 같다고 느끼는데, 작가님 스스로도 그림으로 인해 많이 성장하셨다고 느끼시는 부분이 있을까요?
저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많이 사라졌는데, 저는 이것이 저의 가장 큰 성장 포인트 같아요. 이전에는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어요. 그런데 막상 성공을 위해 무언가를 굉장히 열심히 도전한 것도 아니었죠.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본인의 마음을 내려놓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저는 잘 성장한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이 많은 성장을 이루신 현재, 작가님께서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을까요?
저는 요즘에는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냥 있는 대로 생각하며 채워 넣을 수 있는 벽이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함께 사용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서 함께 그 흰 벽을 물들여가고 싶어요. 누군가 선을 하나 그으면 그것은 그냥 한 줄의 선이지만, 여러 명이 함께 선을 긋다 보면 그것은 다양한 모양을 갖게 되잖아요.그래서 그림을 하나의 점, 선, 면이라고 표현을 했을 때 그냥 그중 하나를 제가 놓으면, 다른 누군가가 같이 그려나가며 함께 완성한다면 저는 너무 기쁘고 즐거울 것 같습니다.
마무리 지으며
- 최근 나간 서울일러스트페어(이하 서일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요. 작가님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정말 뜻깊은 시간이잖아요.
작년에 나간 서일페는 굉장히 오랜만에 참가한 거였어요. 2018년에 처음 나가고, 그 이후로 꽤 긴 공백을 거쳐 다시 참여하게 된 거죠.
그런데 정말 즐겁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어린 친구들만 아니라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들이 저의 그림을 정말 좋아해 주시는 거예요. 제 부스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작품을 감상해 주셨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사랑을 받게 되니 정말 행복했어요. 서일페는 정말 많은 작가님들이 참여하는 행사다 보니, 그 중에서도 저의 작품을 오래 지켜봐 주신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었죠. 처음 서일페에 나갔을 때는 그저 "나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참가했는데, 그 이상의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서, 앞으로도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서 계속 오프라인에서 관람객 분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금 이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개인전을 하게 된다면 어디서 어떻게 할지 고민도 계속하고 있어요. 하하. 그날을 기약하며 최대한 많이 작품을 그리고 싶습니다.
- 개인전도 정말 기대되네요. 현재 생각해두신 것이 있다면 조금 공유해 주시겠어요?
저는 이전 작품들이 뚜렷하게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하. 그래서 언젠가 개인전을 하게 된다면 특정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저와 고양이가 함께한 추억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싶어요.
그리고, 사실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이긴 한데, 언젠가 제가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식장의 신부대기실에 제 그림들을 앉혀놓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어요.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타협하고 존중하며 평생을 함께하는 과정이잖아요. 그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진행하고 싶어요. 특히 결혼이 점점 더 '콘텐츠'처럼 다뤄지는 트렌드와도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손님들은 신부대기실에서 제 그림들과 사진을 찍고, 저는 밖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며 인사를 하는 게 제 꿈입니다.
-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항상 다른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해요. "마감에 쫓기는 와중에 볼보와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라고요. 하하. 정말 구체적인 꿈이지만, 그게 제 목표예요. 마감 때문에 항상 바쁘지만, 손수 잡채를 요리해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그림엽서도 나눠주며, 볼보와 할리데이비슨을 끌고 다니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정정하게 살고 싶다"는 꿈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림을 그린다"는 꿈을 결합한, 제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저는 저 스스로를 "호수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크레인"라고 표현하는데, 제 작품이 사람마다 다양한 감정과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되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의 생각은 다르니까, 그 생각을 바탕으로 수많은 해석이 나온다면, 저는 그걸 바라는 게 전부입니다. 설령 그것이 긍정적인 생각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이라 해도 말이죠. 누군가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파장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저는 더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오래 살아서, 제 작품을 많이 봐주시고, 그만큼 많이 해석해 주시면 좋겠어요. 언젠가 개인전을 하게 되면, 오프닝에 잡채를 많이 준비할 테니 많이 놀러와 주세요. 감사합니다!
[김푸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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