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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연극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독창적인 형식을 통해 스무살 청년 최영우가 일제의 포로감시원으로서 활동하며 겪었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개의 경우 위안부, 정신대, 생체 실험, 대학살 등이 빠지지 않고 언급되며, 지금까지 언론과 다수의 미디어, 관련 서적들이 그러한 내용들을 위주로 반복해서 다루어 왔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만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연극은 단순히 일본의 만행들에 '포로감시원'이라는 이름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에, 어쩌면 무감각해진 지난 역사의 한 조각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포로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적국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강제로 수용하는 시설이다. 청년 최영우가 강제로 징병되어 타국에 위치한 수용소에서 근무하며 고뇌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과연 그의 정체성과 그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그의 친구이자 동료로 등장하는 '병춘'과 더불어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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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단순히 한 명의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장교를 마주하는 순간에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상대를 가해자라고 규정할 수 있지만 포로감시원의 신분으로 타인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상황이 너무나 모호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징병 과정과 근무 환경이 강제성을 갖고 장교들의 대우가 불합리하다고 인지하더라도, 그 순간에 최영우를 비롯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 군인들과 같은 목적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의 일부가 된다.

 

아드리안 하사가 최영우를 가해자라고 여기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순간에도 최영우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항의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러한 집단의 특성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인지함과 동시에 그들이 전범으로 몰려 가해자로 규정되거나 또는 일제에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로 규정되는 순간이 언제나 교차한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_콤마앤드 제공 (c)이강물  (2).jpg

 

 

한 개인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가지의 입장을 동시에 이해하고 수용할 수는 없다. 특히나 피해자로서의 과거, 경험, 관련된 증언들이 강조될 때 사람들은 일정한 외부적 믿음과 정당화의 과정을 거치며 개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를 고착화한다. 또한 한 개인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과 외부에서 그를 피해자로 만드는 일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며, 어째서 그가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자로 인식되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거칠 필요성도 존재할 것이다.

 

심지어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발견 가능하다. 명령을 내린 사람의 잘못은 없지만 명령을 이행한 사람의 잘못은 존재하며 따라서 한쪽만 처벌을 받는 상황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기 전에 이미 저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신분으로 규정이 된 채 상황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치 친위대의 장교이자 유대인 학살 총책임자로 활동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의 현장에서 담당검사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아이히만은 단순히 개인이나 나치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반유대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최영우가 아드리안 하사에게 가한 폭행의 횟수가 몇 번이든 그것은 최영우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일제의 제국주의와 전쟁범죄, 역사적 책임이라는 사실과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심판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최영우는 개인으로서, 한 명의 조선인으로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_콤마앤드 제공 (c)이강물  (9).jpg

 

 

또한 자신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뿐이며 유대인 학살은 불가피한 업무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검사는 "명령이 잘못되고 불법적인 경우에는 명령을 마지못해 따른 것 역시 불법적인 행위로 성립된다"고 말했다.

 

최영우가 반복해서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제네바 협약'이 그처럼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협약에 위배되는 불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이 주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는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그 현장의 직접적 피해자인 아드리안 하사는 또 다른 직접적 피해자 최영우에 대해 위의 사실이 주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언제나 유효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입장 사이에서 한쪽으로 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느 한 지점에서 두 입장 모두에서 고려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한 관점으로부터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이 우리의 생각 너머에 존재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연극은 바로 이러한 관점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이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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