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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 없이 눈이 내렸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날은 점점 추워졌지만 기상예보를 챙겨볼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던 나는 눈이 올 징조를 모조리 무시했다. 애초에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우산조차 챙기지 않았으니 말 다했지. 하룻밤 사이에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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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무척 추웠다. 금방 그치겠거니 했던 비는 멈출 기미를 안 보였고 나는 마지못해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우연히도 날씨에 어울리는, 마음이 무겁고 눅눅해지는 연극을 한 편 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도리를 하고 나오지 않은 오후의 나를 잠시 원망했고, 그걸 핑계로 포근한 후드집업 하나를 빌려 입고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자정을 앞둔 밤 지하철역부터 집까지 걷는 그 몇 분 사이에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첫눈을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내일 아침이면 쌓일 수도 있을까? 그 전에 다 녹아버리려나. 추운 날씨에 방전되어버린 에어팟을 주머니에 넣고, 우산 위에 떨어지는 눈 소리를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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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독토독. 비가 내리는 날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커다란 눈송이는 빗물보다 가볍고 뭉툭한 소리를 낸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투명우산은 이미 하얗게 덮여가고 있었다. 우산을 비스듬히 고쳐들고 하늘을 쳐다보니 일렁이며 내려오는 눈발이 보였다. 세상 전체에 슬로우 효과가 걸린 것처럼,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2024년의 하반기에 접어들고서부터는 하는 것 없이 바쁘게 지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정확히는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이 무거웠다. 가볍게 날아오는 눈송이, 느리게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고 있자니 내가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 무거운 이 부담감으로부터의 탈출. 내가 벗어나고픈 것에 이름을 붙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바뀐 것 하나 없는 이 상황에서 숨쉴 구멍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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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쌓였다. 발자국이 깊숙이 찍힐 만큼 아주 잔뜩. 오전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는 신발이 전부 젖어버렸다. 눈이 이만큼 쌓여 있으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손에 함박눈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파스스 흩어지겠거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똘똘 뭉쳐졌다.

 

벤치 위에 작은 눈덩이를 굴렸다.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는-’ 이라는 표현의 진짜 의미가 바로 이런 거구나. 커다래졌다. 하나를 더 만들어 그 위에 얹었다. 나뭇잎 하나도 주워다 눈사람 씨의 앞머리를 만들어주고 떠났다.

 

그날 밤에는 눈이 더 많이 내렸다. 집 오는 길에 벤치를 보니, 두껍게 눈이 쌓여 있었다. 어느 한 쪽에는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씨의 흔적이라고 믿고 싶은 볼록한 모양이 남아있었다. 곳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둔 눈사람들도 보였다.


밤이 늦어 길가에는 사람이 몇 없었지만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한 번 뒤집었다 내려놓은 스노우볼 안에 들어온 것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으니까 말이다. 눈이 정말 많이 와. 예쁘다.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날이 정말 추워. 감기 조심해. 아마도 각자 소중한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을 테지.

 

신나서 눈사람을 만들었을 사람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또 조금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었다. 마음이 시끄러운 시기를 보내며 조금은 세상에 회의적으로 변해버린 내게 왠지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그냥 눈이 덮인 세상처럼 내 모든 걱정과 불안이 덮여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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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또 하룻밤이 지난 후 아침이 밝자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도로가 얼어 출근길이 걱정된다는 친구, 학교에 가야 하는데 버스가 끊겼고 강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는 공지에 골치 아파하는 친구. 마냥 감상에 젖기에는 역시 현실이 도와주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기사도 봤다. 왜 갑자기 이렇게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이유를 설명해주는 기사였다. 요약하자면, 평균적인 정도보다 높았던 해수면의 온도가 이른 폭설을 불렀댄다. 지난 여름 주구장창 내렸던 폭우와 같은 원인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습설'로 인해 나무나 전봇대가 넘어가고 구조물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히 들려왔다. 아마 내가 모르는 사고도 아주 많이 일어났을 테다. 내 마음을 달래줬다며 눈을 그저 반겼던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때 이른 눈에 위로를 받고, 또 걱정이 쌓이는 아이러니한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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