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달의 뒷면에서 시작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 - 달의 뒷면을 걷다

순정만화xSF 소설 컬래버레이션
글 입력 2024.11.26 14:4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 순정만화의 다양성, 그리고 SF


 

영화 <비천무>, 게임 <리니지>, 드라마 <풀하우스>. 매체와 장르, 콘텐츠의 시대 및 공간적 배경이 각기 다른 세 작품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원작이 순정만화라는 점이다.


1990년대 대한민국 만화계에는 순정만화 붐이 일었다.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권교정, 원수연, 유시진과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완성도 높은 만화를 그려냈고, 드라마화나 영화화가 되는 등 다른 매체의 콘텐츠들에 영향을 주었다. 작품의 양이 축적되는 만큼 순정만화를 연구하는 인문학 도서도 출판되었다.


유명 게임으로 다시 태어난 신일숙 작가의 <리니지>는 본래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순정만화다.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은 혁명의 이상과 과정을 다루었기 때문에 검열을 당하기 일쑤였지만, 같은 이유로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사랑받은 작품으로 유명했다.


순정만화란 것이 결국 사랑 이야기가 아니냐 한다면 역으로 사랑이 들어가는 이야기는 무엇이든 순정만화로서 그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순정만화의 배경은 현대 학교와 직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때로는 장대한 역사적 서술과 함께, 때로는 동서양 신화의 모티프를 활용하여, 주인공이 몸 담은 세계가 어디냐에 따라 특정 직업 세계의 전문 지식을 적재적소에 넣으며, 순정만화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사랑, 갈등, 그리고 인물의 자아와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한 순정만화의 다양성 안에 SF 장르와의 교점이 있음은 당연하다.


폴라북스 출판사의 ‘순정만화xSF소설’ 컬래버레이션 시리즈는 한국 SF장르의 역사에서 순정만화의 역할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 시리즈는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작가 3인-박애진, 듀나, 전혜진-이 1990년대를 전후로 활약해 온 순정만화 작가 3인-강경옥, 신일숙, 권교정-의 세 작품을 오마주하여 일종의 스핀오프 격 소설을 새로이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의 지반인 세 개의 순정만화 작품 모두 SF의 색을 진하게 갖고 있다. 이 컬래버레이션 시리즈 중 세 번째 소설에 해당하는 전혜진 작가의 <달의 뒷면을 걷다>는 미래 우주시대를 배경으로 한 권교정 작가의 원작 만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오마주한 글이다.

 

 

달의 뒷면을 걷다_펀딩용 SNS 디자인 07.jpg

 

 

 

2. 달의 뒷면을 공유하는 이야기


 

<달의 뒷면을 걷다> 책을 받자마자 원작을 읽었던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톰슨(도무송) 기법으로 잘린 겉표지 아래로 원작 만화책 1권 표지와 동일한 그림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원작 만화를 재조명하고자, 원작을 오마주하여 태어난 작품임을 표지에서부터 강하게 알리고 있는 셈이다.

 

 

[표1] 달의 뒷면을 걷다.jpg

 

 

표지에 그려진 금발 여성 ‘나머 준’은 2092년 작중 세 번째 우주 정거장인 ‘디오티마’에 역장으로 부임하는 인물이다. 젊은 나이에 한 정거장의 역장이 된 것 외에도 그에게는 큰 비밀이 있다. 바로 그의 영혼은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의 학구적인 여성 디오티마라는 점이다.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인류 최초로 ‘직접’ 보고 싶었다는 열망 탓이었을까. 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디오티마는 누군가가 그 열망을 필사의 소원으로 듣고 이뤄준 듯이 죽음 후에도 디오티마의 영혼을 유지한 채로 환생을 거듭하게 된다. 무려 기원전에서 2092년까지.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다른 인종, 다른 성별로 태어나더라도 그의 자아는, 알맹이는 기원전의 그리스 여성으로 태어났던 디오티마이다.


디오티마는 나머 준으로 태어나기 직전의 생에서 ‘존 H. 서얼’이라는 이름의 우주인이 되어 마침내 달의 뒷면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생에서 ‘영혼 감별사’라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달 기지 연구자 아서 우코를 만나게 된다. 아서 우코는 존 서얼을 보는 순간 그의 영혼의 본질이 디오티마라는 여성임을 감지한다. 아서 우코는 디오티마의 영혼을 두고 한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진화하는 영혼’이라 말한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삶에 대해 디오티마 본인은 그것이 진정한 진화인지 회의를 품고 있다.


아서 우코는 달에서 태어난 제 손녀에게 디오티마의 이름을 붙여준다. 가족 중 앞선 세대의 구성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고전 속 인물인 디오티마도 아닌, 존 서얼의 본질에서 본 바로 그 디오티마에게서 따 온 이름을. <달의 뒷면을 걷다>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3. 누군가의 목적지는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점


 

지구인들이 달을 개발하는 것이 당연해진 2090년대의 어느 날. 달에서 태어난 월인 디오티마는 성년을 앞두고, 달 개척의 상징인 루나 로드를 따라 달의 뒷면에서 일하는 조부 아서 우코를 혼자서 찾아간다. 디오티마, 줄여서 '다이'로 불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달에 거주하는 월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10대 소녀이며, 달의 마지막 월인은 디오티마의 터울 있는 남동생 라테라사이다. 남매의 부모는 우주암으로 별세했다.


지구의 1/6에 불과한 달의 중력 속에서 나고 자란 월인은 지구에 도착할 경우 고중력 쇼크로 사망한다. 달에 장기 거주한 지구인들은 지구와 다른 환경 안에서 지구암이라는 새로운 병을 얻는다. 희망찬 달 개척 시대에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히자 지구에서는 달에서의 임신과 출산을 금지하고, 월인이 달 밖으로 나올 수 없으며, 달에서 근무하는 지구인들의 최대 체류 기간을 3년으로 규정하는 법을 시행한다. 지구인이 달 영구 거주가 가능한 예외적인 경우는 오직 월인 자녀를 두었을 때뿐이다.


고등 교육을 받아도 달에서 진로를 그리기 어렵고, 달을 벗어날 수도 없는 월인들은 수적으로 소수에 모두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평생 살아갈 달에 지구의 폐기물을 매립하는 문제에 대해 의사결정권조차 가지지 못한 상태다.


지구에서 보는 달의 앞면 경관이 변하지 않도록 폐기물 매립을 달의 뒷면에 한다는, 지극히 지구인 위주의 시야에서 내린 결정 때문에 디오티마는 더욱 마음이 상한다. 디오티마는 월인의 처우를 월인이 정할 수 없는 부당함을 느끼거나 월인 아이들에게 복지가 필요할 때 연장자 월인으로서 시위도 마다하지 않는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예정된 소멸을 무시할 수는 없다.


오죽하면 자신의 담임을 맡은 연구원 호쿨라니에게 월인의 처지를 자연멸절에 빗대어 말하는 디오티마다. 디오티마는 전례 없는 월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월인의 미래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묻지만 이에 명료하게 답해 줄 어른은 없다. 성년이 되기 직전, 디오티마는 보다 근본적인 지점으로 고개를 돌린다. 자신의 이름은 왜  디오티마인가. 하필이면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밟은 존 서얼의 별명이었다는 그 디오티마를. 다른 우주인 두 명을 살리고 영웅으로서 생을 마감한 그 남자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디오티마를. 도대체 이 이름을 붙일 때 제게 무슨 기대를 걸었길래. 나아갈 길 없는 존재로 세상에 났는데 왜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사람의 이름을 붙였느냐고. 그것이 제게 이름을 준 조부를 찾아간 이유다.


아서 우코가 손녀 디오티마에게 바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달에서 태어났기에 여느 지구인과는 달리 자꾸만 지구를 돌아보게 하는 그리움 없는 새로운 존재로서, 그저 앞으로 갈 길을 누구보다 멀리 보기 바랐을 뿐이라고. 지구의 중력에 매이지 않은 존재로서, 월인 소녀 디오티마가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다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낸다면, 그 한 걸음에 흔들림이 없기를 아서 우코는 바랐다.


원작을 본 독자라면 디오티마의 영혼을 한 존 서얼이 지니어스 쌍둥이를 살리며 희생했던 진짜 이유를 알고 있을 테다. 디오티마는 사실 ‘지구의 중력 안에서 죽기 위해’ 그 선택을 했다. 수구초심.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두는 여우처럼, 지구에서 태어난 영혼들은 대다수가 지구에서 죽기를 원했다. 끝없이 나아가는, 진화하는 영혼 디오티마 또한 자신이 태어난 중력 안에서 죽기를 바랐다.


원작 디오티마가 보고 싶어 했던 달의 뒷면이란 생명이 유한한 인간이 대를 이어 이뤄가기 바라는 소망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개체로서’ 도달하고 싶었던 세상의 모든 이치를 상징한다. 영혼의 본질이 환원되지 않은 채로 수많은 환생을 거듭하며 디오티마는 결국 달의 뒷면에 몸소 도달했다. 인간들은 선조의 이름을 후대에 부여하며 자신의 바람이 언젠가 이뤄지기를 바랐고 그 꿈 중 하나는 달에 인간이 (단기적으로나마) 거주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인간은 소멸되지 않는 하나의 영혼, 혹은 대를 잇는 유지로써 파종했고 그 씨앗 중의 일부는 기존의 그리움과 제약이 없는 다른 존재로 자라난다.


<달의 뒷면을 걷다>와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두 이야기는 달의 뒷면을 공유하지만 그곳의 의미는 다르다. 지구에서 태어난 디오티마에게는 알고 싶은 세상이었고 마침내 다다른 곳이었으며, 달에서 태어난 디오티마에게는 고향의 일부이자 마침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알게 되는 곳이다. 지구인들이 달에 만든 주황빛 루나 로드가 끝나는 그 지점에서 월인 디오티마는 월인으로서 월인들의 삶을 위해 가장 먼 곳을 바라보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로 한다.

 

 

javier-allegue-barros-55bVEzGVnzY-unsplash.jpg

 

 

 

4. 끝없는 나아감에 대한 한 가지 대답


 

영혼감별사인 아서 우코는 달에서 존 서얼의 영혼인 디오티마를 보았을 때 그 영혼이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디오티마를 ‘계속해서 진화하는 영혼’이라 불렀다. 정작 디오티마는 끝없는 나아감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달의 뒷면을 걷다>에서 지구인들이 당연하게 월면 모래, 희토류 등 달의 자원을 가져가고 지구의 폐기물은 달에 매립한다는 설정에서 독자는 인류 욕망의 끝없는 나아감을 느낄 수 있다.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 작품을 볼 때면 으레 드는 거부감이 건드려지는 설정이며, 월인 디오티마의 반대 시위를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넣은 비판적인 설정임을 알 수 있다. 먼 미래의 대우주시대라면서 지구인, 외계인 모두 영어를 쓰는 데서 간혹 깨지는 몰입감, 지구인들의 우주 탐험이 콜럼버스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던 땅에 도착한 것을 두고 ‘신대륙 발견’이라 불렀던 옛날을 보는 듯한 다소 불쾌한 기시감. 우주에 대한 탐구가 결국 미지의 땅을 착취의 굴레 안에 집어넣는 인간들의 이기적인 행위로 비칠 때다.


끝없는 나아감이 여전한 착취의 굴레 안에 국한되지 않으려면 고개를 들고 멀리 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떤 방향으로 더 이동할 수 있는지, 아니면 이 지점에서 풍요를 일굴지 사유해야 한다. 전혜진 작가는 월인 디오티마의 목소리를 통해 인류의 진일보의 영역이 영토와 같은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인권 신장이라는 영역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디오티마는 이웃에 사는 코스모 폴리스(우주 경찰) 제프 바비케인이 말한 복지의 개념을 역으로 접근하여 월인들이 달에서 학부 과정을 들을 수 있게 만든다. 제프는 복지에 대해 ‘수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누리는 것’이라 말했다. 이에 디오티마는 수혜를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달에 있는 지구인들)을 근거로 월인들의 처우 개선을 주장한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디오티마의 시도는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오며, 달보다 고중력인 행성에 갈 수 없었을 뿐 더 작은 중력의 행성 등에는 갈 수 있음을 알게 된 미래에 월인의 이동 제한에 대한 법령 또한 수정된 것으로 나온다.


통칭 다이, 즉 월인 디오티마의 행보를 통해 전혜진 작가는 SF장르에서 엿보이는 잔인했던 ‘개척’의 역사와 인류의 관성적인 나아감에 대해 사유하고 반성할 쉼표를 제시한다. 또한 다이의 행보는 원작 디오티마의 회의감에 대해 원작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들려주고 싶은 하나의 대답으로 보인다.


지구에서 시작해서 지구 밖으로. 지구 밖에서 시작해서 더 멀리로. 그러나 그 ‘멀리’란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인권 신장의 범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다이의 결정에서 그간 SF 장르에서 내가 느꼈던 거리감 또한 좁혀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상의 미래적 배경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SF 장르는 오히려 더 날카롭게 현재의 문제를 다루며 현시대 이슈에 대한 사유를 돕는다. 원작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SF 소설에 입문하고 싶은 예비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픈 소설이었다.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컬래버레이션의 시즌 2가 있기를 바라본다.

 


[신성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5.01.1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