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낮잠 시간에 떠난 평행우주여행 -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공연]

수많은 ‘만약’.. 그래도 역시 ‘나’는
글 입력 2024.11.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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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을 가정하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그 질문들에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대체로 건설적인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영양가 없는 가정들이 대부분이지만, 세상만사 모든 일이 꼭 효용성만으로 전부 해석되어야 한다면 그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그 수많은 ‘만약’들이 때로는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세계의 이야기거나, 간절히 바란다 한들 결코 되돌릴 수는 없는 과거로부터 파생된 세계관을 지녔을지라도, 쓸모나 보람만으로는 온전히 평가될 수 없는 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싶다.

 

‘평행우주’ 세계관이 재미있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일상의 후회에서 출발된 상상은, 끝내 두고 올 수밖에 없던 그 당시의 선택지가 살아있는 또 다른 시간선에 닿게 된다. 지금의 현실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의 나의 이야기이다.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통해 SF가 대중화되면서, 시간 여행뿐만 아니라 평행세계나 다중우주 개념 역시 우리들에게 익숙한 키워드가 되었다.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 이제는 그 자체만으로는 마냥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소재를 끊임없이 변주해나간다는 점이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평행우주의 인기가 위로와 응원을 바라는 우리 무의식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평행세계로의 여정을 통해 자신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이상적인 선택지 대신 기꺼이 작고 보잘것없는 원래의 우주로 회귀하기를 선택하는 주인공. 뻔한 교훈이겠지만, 대단치는 않더라도 그 자체로 소중한 우리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뻔함이 좋다. 그건 어쩌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평행우주를 상상하며,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영양가 없는 만약을 가정하는 이유와도 같은 맥락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다르게 볼 수 있는, 그래서 결국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힘 같은 것들 말이다.

 

평행세계가 실제 현실에서 가능한지 여부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물리학이건 양자역학이건, 일단은 그 원리를 설명하고 가능성을 증명하는 이론과 가설들을 소화할 재간이 전혀 없기 때문이고, 그저 내겐 수많은 선택의 과정을 통해 정의되는 ‘삶’이라는 개념 자체가 더 흥미로울 따름이다. 비록 그 선택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그 수만큼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내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되는 법이니까.

 

 

어느물리학자의낮잠_포스터.jpg

 

 

2014년에 초연되었던 연극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이 2024년 되돌아왔다. 그 10년 사이 SF는 이제 연극 무대에서 역시 낯설지 않은 장르가 되었다. 그러나 SF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많아지고 있음에도, 작품의 구성 자체가 긴밀하게 현대 과학 이론을 제대로 녹여낸 창작품은 여전히 드문 편이다. 그런 점에서 파동/입자의 관계, 양자 얽힘, 슈뢰딩거의 고양이, 우주 생성 이론 등 양자역학 이론을 깊이 있게 적용하여 극을 구성한,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본격적인 ‘SF 연극’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정과 신화를 설명하려는 물리학도 ‘차연’과 기억을 잃고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어느 늙은 노파. 분리된듯한 두 시공간은 언뜻 과거와 미래로 연결되는 시간선인 듯, 어쩌면 서로의 꿈, 혹은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평행우주가 될 수도 있다.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극은 하나의 명확한 진실을 제시하지 않으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듯싶었다. 그렇게 정리한 나의 해석은 그 혼란스러운 이야기들 모두가, 야광 버섯 동호회 ‘서 회장’이 낮잠을 자며 꾼 꿈이었다는 것이다. 극 중 여러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반복되는 숫자들이, 야광버섯을 세다가 잠든 서 회장의 꿈과 현실의 경계를 나타낸다고 생각됐다.

 

그저 평행우주를 테마로 하는 꿈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꿈을 매개로 서 회장이 실제 자신의 평행우주들을 여행한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의 서 회장이 기억을 잃게 된 이유가 어쩌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평행우주 속의 자신을 겪다가 결국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린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주체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본 작품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주변부가 아닌 자길 기억해야 해요. 뭔가 계속 기억하려는 나 자신, 주체!”

 

- 연극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中

 

 

작중 꿈속에서 기억을 잃은 노파를 통해 반복되는 위의 대사가, 현실 속 서 회장이 결국 주체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결국은 어떤 선택이 옳았건 되돌릴 수는 없고, 어쨌건 그건 당시 내가 선택한 최선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미 지나간 선택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닌, 그 선택들을 통해 나아가고자 했던 목적과 그걸 위해 앞으로 내려야 할 또 다른 새로운 선택들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평생 동안 욕망을 실현해나가며 분투하지만, 결국 그 욕망의 정거장에서 미끄러져 소진되고, 빈 껍데기(기표)로 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 기획의도 中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야광 버섯’이었다. 야광 버섯을 통해 서 회장이 얻고자 했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 찝찝했다. 서 회장과 차연의 전사(前史) 등을 제공했다면 서사적 재미가 좀 더 충족됐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80여 분이라는 시간상 전부 담아 내기는 무리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이 야광 버섯이야말로 기획의도에서 밝힌 기표(記標)를 대변하는 대목인지도 모르겠다. 해당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 했던 본래의 의도와 목적, 즉 기의(起意)는 잊어버리고, 그저 야광 버섯을 세는 행위만을 반복하는, 기표만이 남아버린 것이다. 결국 이유도 모른 채 야광 버섯을 세는 행위가 주체를 잃어버린 서 회장의 상태를 대변하게 된다. 그 찝찝함이 의도된 장치였다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된 듯싶다.

 

물리학 전공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입장에서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그리 쉬운 극은 아니었다. 많은 감상이 확언이 아닌 추측의 형태로 남은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해당 극이 ‘하드 SF’ 장르라는 원인이 숨겨져 있었다. 단순히 평행우주 세계관을 차용하는 것이 아닌, 그 이론과 개념을 심도 있게 적용하는데 그 목적이 놓여 있었다.

 

사전에 정보를 치밀히 확인했다면 관람 중과 그 후에 혼란을 방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덕분에 함께 관람한 지인들과 식사 자리에서 열띤 토론을 하게 됐다. 평소 생각지도 못한 양자역학을 주제로.

 

기획의도를 살펴보며, 물리학을 소재로 하는 작품에 기의/기표라는 언어학적 개념이 차용된 것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한층 더 어려워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물리학 역시 철학의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은 모두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태초에 철학이 던진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현대 물리학이 하고 있는 것처럼, 전혀 상반된 듯한 두 학문은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여전히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우주와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차연, 자신을 기억해 내야만 하는 노파, 목적을 잊은 채 야광 버섯을 세는 서 회장, 그리고 하나의 변수만 알게 되면 또 다른 우주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또 다른 차연.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인간 삶의 우연성과 ‘예측불가’성을 설명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이론이 된다고 한다. 그 말대로 세상은 참 알 수가 없고, 인생은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찾지 못했다. 당장 과거의 후회를 가정하면서도 미래가 정해진 마냥 운명론에 기대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면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고정 불변하지 않은 내 존재에 안도한다.

 

그렇지만 결국 삶이라는 방정식에서 필요한 건, 변수인 목적을 찾아내는 것. 중요한 건 기표가 아닌 기의일 테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관계처럼 수많은 평행우주는 곧 내 스스로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 목적 역시 내 선택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 테드 창, 『숨』. 392~393p. <옴팔로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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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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