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히키코모리 어학 오타쿠에서 루마니아 소설가가 되기까지 -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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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인입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어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설도 씁니다. 정말 악마적으로 멋있지 않습니까?
웹소설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설정 과다’라는 말을 쓸 때가 있다. 주인공에게 주인공적 특성을 부여하다가 도가 지나치면 독자들은 설정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실존 인물에게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다. 이력이 화려하여 그 자체로 이야깃거리가 될 때, 어딘가에 나오는 캐릭터 같다는 의미에서 칭찬으로 사용한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를 보고 ‘설정 과다’같은 현실 속 인물을 이야기하는구나 했다. 히키코모리라지만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주인공적 기질이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작가와 나는 정확하게 한 살 차이가 난다. 나는 생일이 똑같은 인물에게 정이 가는 습성이 있어서 나보다 365일 뒤에 태어난 작가에게 마음이 갔다. 일본 문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작가가 사는 지역, 놀러 갔던 곳, 설명이 붙지 않은 대학생의 취업 준비 활동까지 알아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읽어서 더 쉽게 정이 들었다. 히키코모리가 된 저자가 말하는 우울과 초조함, 이건 또 내가 잘 아는 감정이었다.
“‘주변과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자의식”
저자는 ‘사춘기다운 나르시시즘’이라는 정제된 표현을 사용했는데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하는 그 단어, 중2병.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고 마이너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확장 중이다. 하지만 나는 일개 독자이고 그는 이웃 국가까지 번역본을 출판한 작가이다. 평범하게 공감했지만, 그는 비범하다. 영화를 탐구하다가 루마니아어를 주제로 삼은 루마니아 영화 ‘경찰, 형용사’를 읽고 루마니아어 공부를 시작한다. 지금의 저자는 노트를 펼쳐 루마니아어로 뭔가를 적고 나서는 “일본어로 이루어진 내 세계를 루마니아어로 느긋하게 재인식하는 것이다”라는 문학적인 말을 한다.
“뼛속까지 어학 오타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즐거워도 학교의 강제적인 교육 시스템 하에서는 오히려 흥미를 잃는다. 그러나 흥미를 느낄 계기만 생기면 자발적으로 배우게 된다. 이탈리아어 자발적으로 배웠고 스페인어로 이어질 뻔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영어에는 트라우마가, 그리고 나서 당도한 새로운 곳은 연약한 입지의 루마니아어.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일본에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는 어려움이 대충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카자흐어를 배울 당시 시중에 나와있는 한국어-카작어 사전은 딱 한 권이었다. 교수님도 말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노란 사전이 있을 텐데 그걸 사라고. 인터넷을 봐도 러시아어-카작어 번역기나 영어-카작어 번역기는 있어도 한국어-카작어 번역기는 없었다. 아니 번역기는 사치다, 한국어-카작어 사전을 제공하는 포털사이트도 없었다. 그러니 수업 교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는 러시아어로 쓰인 카작어 교재를 사용했다. 나보다 20년가량 앞서 대학에서 스웨덴어를 전공한 친척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어-스웨덴어 사전이 없어서 영어-스웨덴어 사전으로 공부하느라 영어 실력이 늘어서 졸업했다는 이야기. 저자도 같은 말을 했고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마이너 언어 공부의 서러움.
“루마니아 영화를 보고 싶다, 시타루 감독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이겼다”
영화제에 루마니아와 프랑스 공동 제작 영화가 상영된다는 이야기에 보기 힘든 루마니아 영화, 그것도 최신작 상영을 위해 히키코모리인 작가는 집을 나섰다. “나도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즐기고 싶으니까”라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 처음으로 루마니아어로 대화한 루마니아인이 좋아하는 감독이 되었다. 오타쿠로서 전율이 이는 감동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이어서 또 다른 감동 실화가 등장한다.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기 좋은 컬처 사이트에서 서평을 읽고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발견한다. 주변에 물어물어 책을 구매하고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작가와의 만남이 성사된다. 일본 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짧게 쓴 소설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했고 해당 번역본은 작가를 거쳐 문예지로 넘어간다. 그 후 저자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일본인이 일본에 대해 쓴 루마니아어 단편을 쓰고 있다고 본인을 홍보한다. 그 결과 루마니아 웹 문예지에 그의 작품이 실리게 된다.
이야기가 영화에서 문학으로 흘렀다. ‘루마니아어로 번역해 본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적당한 대체 단어를 찾으면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고, 루마니아어로 시를 쓰고 싶어서 루마니아 시인을 찾아 제자로 삼아주기를 간청한다. 몇 년 만에 일본에서 루마니아 문학의 번역 출판이 확정되자 신나서 흥분했던 일화는 일본의 루마니아 문학가(이자 번역가)와도 연이 닿게 되어 서로 연락을 주고받게 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저자는 루마니아에서 발매된 루마니아 현대 문학사 책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영화를 보다가 루마니아어를 다룬 루마니아 영화를 보고 운명처럼 루마니아어에 빠진 한 일본인 청년. 본인의 글을 직접 루마니아어로 번역하여 공개했다. 현재 그는 루마니아에 가본 적 없지만 루마니아어로 글을 쓰는 일본인 작가가 되었다.
오타쿠 기질이 좋은 쪽으로 발현한 극히 드문 케이스이다. 나만 해도 오타쿠이지만 창작이 아니라 순수한 소비로만 흐른다. 작가는 방대한 양의 독서와 영화 감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책을 써서 다른 나라에 출판하는데 나는 방구석에서 엔화쓰기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된다는데... 저자는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되는 이상을 실현했고, 여기 나는 하다 보니 잔고만 줄어들더라는 현실 버전으로 존재한다.
아니, 뭐든 하다 보니 뭐가 되긴 한 것 같다. 그간의 어학 공부와 오타쿠 생활로 저자의 거짓말 같은 행복에 공감할 수 있었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료의 성공담을 듣는 것만 같아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마 이 책을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겠지. 뭐든 하다 보니 이 책에 한해서 나는 어떠한 독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장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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