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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온 지 사흘 정도 됐을 무렵 호기롭게 영화관에 방문했다. 포부에 비해 청해 실력은 영유아 수준이어서 로맨스, 드라마, 액션 등의 선택지는 무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전공수업에서도 다뤄졌다던 애니메이션 "白蛇 2:青蛇劫起 (백사 2: 청사의 시련)"이 상영 중이었고, 그렇게 "겨울 왕국 1" 이후 10년 만에 극장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중국어로 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을 타겟팅 해 100분 내외로 러닝타임을 끊는 반면 "백사 2"에서는 장장 120분의 러닝 타임 동안 사계가 변하고 온갖 사건사고가 펼쳐진다. 발단과 전개만 반복되다가 절정, 열린 결말으로 끝이나는 기-승-기-승-전 의 구성이 아쉬웠지만 애니메이션 기술과 영상미만은 인상적이었다.

 

본 애니메이션은 중국의 유명한 전기담(傳奇談)인 백사전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동류의 리메이크 작이 상상이상으로 많다. 1978년 임청하 주연의 백사전, 이연걸이 법해로 출연한 백사대전(白蛇傳説) 등 걸출한 배우를 앞세운 작품 뿐 아니라 2019년에는 백사전을 모티브로 한 1992년작 '신낭자전기'를 리메이크한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백사 부인"이라는 작품이 나왔으니, 이 하얀 뱀의 설화는 오래 전부터 현재까지 수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진정한 스테디 셀러라고 할 수 있다.

 

정통 사극이 아닌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이렇게 까지 인기몰이를 하는 것이 신기해, 설화의 내용과 수 많은 작품들 중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에서 각각 한 작품 씩을 추려보았다.


 


백사전 白蛇傳


 

중국 송나라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로 중국 항주 서호(西湖)의 뇌봉탑(雷峰塔)에 얽힌 전설이다. '인간과 요괴의 사랑' 등 초자연적인 요소를 포함한다는 점을 놓고 보면 언뜻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비견된다. 그러나 금오신화(특히 이생규장전) 에서는 사랑이 사회적 제약과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통해 철학적 주제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그려내고자 한다면, 백사전은 감정과 서사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야기는 천년을 수행한 백사 백소정과 오백 년을 수행한 청사 소청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서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수행을 멈추고 인간 세계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젊은 남자 허선을 만난다. 백소정은 허선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 결국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결혼 후 백소정과 허선은 약방을 차려 사람들을 돌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이들의 평온한 일상은 법해선사라는 승려가 등장하면서 깨지기 시작한다. 법해선사는 백소정이 사실은 천년 묵은 요괴임을 알고, 허선에게 이를 경고한다. 허선이 이를 믿지 않자, 법해는 단오절에 웅황주를 마시게 해 백소정의 요괴 본모습이 드러나고, 이를 본 허선은 충격으로 죽고 만다.


허선을 잃은 백소정은 그를 되살리기 위해 남극선옹을 찾아가 영지초를 얻어 허선을 부활시키지만, 이내 법해선사에 의해 허선은 금산사에 감금된다. 백소정은 소청과 함께 남편을 구하기 위해 법해와 맞서 싸우지만 결국 패배한다. 허선은 작은 스님의 도움으로 탈출해 다시 백소정을 만나고, 백소정이 요괴임을 알게 되지만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집에 돌아온 백소정은 아들 '허몽교'를 낳았는데, 아들이 100일째 되는 날 법해선사는 백소정을 뇌봉탑 아래에 봉인해버리고, 이에 허선은 삶에 회의를 느껴 결국 승려가 된다. 허몽교는 자라 과거에 급제한 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뇌봉탑으로 가서 그녀를 해방시킨다.

 

이야기 전반을 따라가다 보면 요괴일지라도 악행을 일삼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살고자하는 소청,허선 부부를 기어코 갈라놓는 법해가 악역으로 비춰진다. 이를 통해 자유연애에 대한 동경과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는 봉건 세력에 대한 거부감을 읽어낼 수 있다.


 

 

1993년 영화 청사(靑巳)


 

백사전을 모티브로 한 첫번째 작품은 홍콩 영화 청사(靑巳)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백사전 이야기의 중심이었던 백소정과 허선의 로맨스에서 벗어나, 소청의 내면과 감정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청을 미숙하지만 자유롭고 활발하며 인간과 요괴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소청이 법해선사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겪는 감정적 갈등을 주요 축으로 삼아, 소정-허선의 전통적인 로맨스와는 다른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왕조현이 백소정 역을, 장만옥이 소청 역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백소정은 지고지순하지만 강단 있는 여인으로, 소청은 자유분방하고 왈가닥스러운 인물로 그려지면서, 이들 사이의 대비를 영화의 큰 매력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조문탁이 연기한 법해선사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전까지 백사전에서 법해선사는 주로 연로한 고승으로 등장했지만, 청사에서는 젊고 준수한 승려로 그려진다. 법해가 소정 자매와의 만남을 통해 이유불문 요괴를 봉인하던 자신의 가치관에 의문을 품는 모습도 언뜻 비춰진다. 이러한 법해의 캐릭터 변화는 기존의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 점에서 영화 버전 '백사전'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소청은 자신을 죽여달라는 허선의 요청을 결국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진다. 허선과 소정의 아이를 소청이 맡아 기르게 되면서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이와 같은 결말은 인간과 요괴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들의 복잡한 감정선을 부각시키며, 관객들에게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인간과 요괴,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그리며 그 속에서 소청이 겪는 감정의 진폭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이 영화는 백사전의 이야기를 색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1992년 드라마 신백낭자전기(新白娘子传奇) 


 

신백낭자전기는 중화권 역대 시청률 4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로, 백사전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 중에서도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백사전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캐릭터 간의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큰 특징으로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다수 삽입되어 있다는 점인데, 감정이 고조되거나 흥이 오르면 이를 노래로 풀어냈다고 한다. 2019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재탄생하였다. 아쉽게도 뮤지컬적인 요소는 모두 사라졌다.


 


2019년 애니메이션 백사 시리즈


 

"백사: 인연의 시작(白蛇: 缘起)"은 2019년 개봉한 백사전 전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한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의 백소정과 허선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요괴와 인간 간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운명적 만남과 인연을 다루고 있다. 특히 뛰어난 애니메이션 기술로 호평을 받았으며, 2021년에는 후속작 "백사2: 청사의 시련(白蛇2:青蛇劫起)"이 개봉했다. 속편에서는 "청사(靑巳)" 에서 처럼 소청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법해에게 봉인된 백소정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그리며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백사전의 배경, 항주 서호와 뇌봉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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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절 연휴를 이용해 항저우에 방문했다. 설화의 배경이 된 서호와 뇌봉탑을 직접 두 눈으로 담기 위함이었다. 마침 비가 내리는 서호와 드문드문 떠 있는 조각배들이 절로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연상케 했다. 뇌봉탑 내부에서 나무로 조각한 설화의 내용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서사와 결합된 공간은 깊이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아픔을 나눈 공간은 말 못할 전율을 느끼게 하고 신묘한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공간은 사소한 잔흔으로 말미암아 정말 그 일이 있었던 것처럼 믿게 만든다. 자연 조건을 극복 또는 화합하여 지어진 건물이 좋은 건물이듯 하나의 공간에 이야기, 한 세대만의 가치, 기술력이 덧붙어 문화적인 맥락이 겹겹이 쌓여간다는 이야기를, 나는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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