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파레노 내 방은 또 다른 어항.jpg

석양빛 만, 가브리엘 타드의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2002),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2022)

 

 

<필립 파레노: 보이스> 전시가 열리는 M1 전시장의 전경. 전시는 작품들이 구역을 나뉘어 전시되는 개별적 개체가 아니라 전시장이라는 한 공간을 함께 영위하는 상호작용체라는 것을 놀라운 방식으로 상기한다. 그렇게 감상자는 들어섬과 동시에 물고기들이 부유하고 침범하는 어항 속으로, 석양빛 아포칼립스 속으로 동시에 입장하게 된다.


4월 13일, 리움 미술관에 방문하여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 전시를 감상하였다. 필립 파레노는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로, 30년간 역동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전시와 창작 방식의 혁신을 추구해왔다. 이번 전시는 파레노의 국내 최초, 아시아 최대의 개인전이다.


이번 <보이스> 전시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요소는 ‘작품과 작품이, 전시장과 작품이, 전시와 감상자가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작용하는가’이다. 파레노에게 ‘전시’는 무수한 선들이 이어지고 엮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드로잉과 본질적으로 같다. 전시는 그저 작품을 생산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창작행위로, 전시 공간은 그가 작품을 선보이는 무대인 동시에 작품 그 자체이다.

 


막.jpg

‘막’(2024), 필립 파레노

 

 

그러한 점에서 <보이스> 전시는 미래의 예술가들에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시사하고, 감상자들에게 전시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위 사진은 리움 미술관의 야외 데크에 설치된 ‘막’(2024)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파레노의 가장 최신작이다. '막'은 파레노가 언어학자, 엔지니어들과 협업하여 만든 복합 ‘AI Creature’로, 서울 도심의 다양한 데이터들을 수집하고 이를 ‘델타에이(aA)’라는 새로운 언어로 변환하여 미술관 내부로 송출한다.


‘막’은 전시장의 모든 것들이 (심지어 감상자들까지도)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상징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작업 과정에서 역시 다양한 분야와의 연결과 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델타에이는 배우 배두나가 목소리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들리는 - 미술관을 부유하는 기묘하고 기이한 소리들이 바로 그것이다.

 


델타에이 조명.jpg

'움직이는 조명등'(2024), 필립 파레노

 

 

M1 전시장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세 개의 ‘움직이는 조명등’ (2024)은 막의 일부로, 델타에이와 상호작용하며 위 아래로 움직인다.

 


여름없는 한해.jpg

'여름 없는 한해'(2024), 필립 파레노

 

 

전시장을 석양빛으로 물들인 접착 시트와 전시장 복판에서 주홍빛 눈을 맞으며 연주자 없이 스스로 소리를 내는 피아노 또한 막이 느끼는 ‘멜랑콜리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작품해설 발췌)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는 서사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렇게 감상자들은 전시장 전체가 거대하게 살아 숨쉬는 막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 전시 자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파레노가 AI Creature를 내세워 독창적인 전시를 선보인 것은 감상자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도 좋은 영감을 주었다. 사물과 공간, 인간과 비인간(AI)을 어떻게 연결하고 상호작용할 것인가, 파레노는 화두를 던진다.

 

이때쯤, 전시 제목인 <보이스>는 ‘사운드’가 이번 전시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상기한다. 소리의 공간 속에서 맞물리고 중첩되는 특성은 작품 간의 연결이자 감상자와 작품 간 상호작용으로서 전시의 중심이 된다. M1 전시장 전체를 부유하는 델타에이, 피아노의 선율, 그리고 조명등이 움직일 때 나는 기계음은 작품 간 경계를 흐리고 서로를 침범하며, 공존한다. 이는 M2 전시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세상 밖 어디든.jpg

'세상 밖 어디든'(2000), 필립 파레노


 

M2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작품이라면 단연 ‘세상 밖 어디든’(2000)을 꼽을 수 있다. 일정 텀을 두고 사운드와 함께 거대 스크린 판넬 속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캐릭터였던 ‘Annlee(이하 안리)’. 델타에이를 작업했던 배우 배두나가 안리의 목소리를 맡았다.


1999년, 파레노는 동료 위그와 함께 실제로 안리를 만든 만화용 캐릭터 회사와 계약을 맺어 안리 이미지에 관한 저작권을 얻은 뒤, 그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러한 행위로 인해 안리는 시장에서 벗어나 상품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파레노는 안리를 ‘자신의 모호한 존재를 숙고하며, 가상 세계에 머무는 멜랑콜리한 캐릭터’라고 정의했다. (작품해설 발췌) 복합적 AI 막과 마찬가지로 안리는 비인간이지만 ‘멜랑콜리아’라는 모호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파레노가 AI와 캐릭터(비인간)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전시에 협업 시키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새롭고 독특하게 다가온다. 다만 막이 석양빛 멜랑콜리아라면, 안리는 푸른빛 멜랑콜리아로 전시장을 물들였다는 점에서 다를 수 있겠다. 그렇게 푸른 카펫 위에 서게 된 감상자들은 거대한 화면 속에서 텅 빈 동공으로 그들을 응시하는 해방된 안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안리

안리 

나는 상품이야

내가 채웠어야 했을 시장에서 자유로워진 상품

만화책 속에서 덜컥 죽어버린

어디든,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어디든! 

그곳이 어디든! 

그곳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나는 가상의 캐릭터야

하나의 기호 

유령(ghost)이 아닌

그저 껍데기(shell)

 

(작품해설 발췌)

 

 

파레노 껍데기.jpg

'유령이 아닌, 그저 껍데기',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 전시는 풍부한 작품의 이야기와 사운드로, 곱씹어 볼 수록 작품 간 새로운 연결과 상호작용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웠던 전시였다. 사물과 사람, 비인간과 인간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하면 감상자가 더 풍부한 내러티브를 스스로 만들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미술작업이 주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청각적으로 감상자들이 충분히 작품을 느낄 수 있게 한 것, 리움의 구조적 장점을 잘 살려 전시를 구성한 것 모두 미래의 예술가를 꿈꾸는 이라면 큰 영감을 얻어갈 수 있었던 전시였다.

 

 

신지원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동시대의 문화예술을 향유합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