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연극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

노동의 모순을 끊고 건강한 청춘 보내기
글 입력 2024.08.2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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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처음 알바를 시작했다.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벌어 문화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시작했던 알바였다.

 

알바도 한번에 붙지 않는다. 수 차례 알바를 지원하고 연락이오면 면접을 본다. 면접을 볼 때 '바로 채용'될 수도 있고, 추후에 연락을 받고 채용될 수도 있다. 첫 알바라 긴장해 몸이 꼿꼿했던 풋풋한 새내기와는 달리, 그래도 조금은 노련해진 알바생이 되었다. 물론 알바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언제나 설렘과 긴장, 불안, 걱정이 공존하는 건 사실이다.

 

알바는 노동이고, 우리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각자가 처한 환경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알바를 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계 유지'를 하기 위해서다. 학비, 월세, 생활비, 여행 자금, 문화생활비, 결혼 및 육아비, 노후 대비 자금 등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한다. 그 '노동'을 중심 소재로 유쾌하게 풀어나간 연극이 있다.

 

제목은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으로, 원작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김현탁 연출이 재구성한 작품이다. 원작에서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베르나르다 알바라는 과부의 집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는데, 베르나르다가 두 번째 남편을 잃고 다섯 딸들에게 8년 상을 강요하는 것에 모자라 딸들이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감금한다. 이때 마을 청년 페페의 등장으로 딸들의 억압된 본능과 감정이 깨어나게 되지만, 막내딸 아델라는 본능적 선택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김현탁 연출은 노동과 한국 사회 알바의 현실을 엮어 마냥 웃을 수 없는 씁쓸한 서사로 재탄생시켰다. 원작을 보지 않은 필자는 연극을 관람하고 원작 스토리를 읽어보았을 때 사실 확실한 유사성을 찾지 못하고 혼란을 느꼈는데, 오히려 이러한 혼란이 우리나라 노동 현실을 강하게 보여주려고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표현력이 우수한 연극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


 

02-알바의집, 배로나르다 공연 포스터 이미지.jpg

 

 

이 연극의 매력은 단언컨대 '표현력'에 있다. 2005년에 창단된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연극과 연극 바깥 사이의 경계 위에서 실험을 거듭하고 순수 연극 정신을 치열하게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연극 속에는 다양한 실험 정신이 담겨 있다. 연극 시작은 19시 30분이었으나 15분 전부터 무대에 배우들이 등장해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 두 분이 무대 장치를 건들이며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고, 가운데 어떤 남자 분이 관객을 등지고 누워 있었다. 저분들은 연극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일까, 아니면 배우들일까 생각했다.

 

아냐, 분명 배우들일거야. 연극 준비는 관객 입장 전에 다 끝났을 거라고.

 

예상이 맞았다. 여자 두 분은 노동자들이었고, 남자는 신이었다. 연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연극을 준비하는 전반적인 과정도 노동에 해당됨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남자가 일어나 곰과 호랑이에게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인간이 되는 법'이다. 마늘과 쑥이 아닌 피자와 콜라를 100일 동안 먹어야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연극이 '비정규직 노동'과 '청춘들의 노동 작업 현장', 한국 사회의 알바 현실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만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신화를 활용해 보여주고 있다.

 

연극 속에는 편의점, 요식업체, 배송업체, 물류업체, 키즈카페 등 다양한 알바가 등장한다. 자칫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을 그들의 표정과 행동으로 과하게 표출해냈다. 배우들이 세계 각국으로 배달을 하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사방팔방 달리는 장면으로 보여주었는데, 이 장면이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연극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보여주기 위해 과장되게 장면들을 그리고 조립했지만, 그 본질은 관객들에게 여전히 멈추지 않고 챗바퀴처럼 굴러가는 노동 현장을 '각인'시키기 위함에 있지 않을까.

 

연극 중반부에 '배로나르다'라는 인물이 하인들을 속된 말로 부려 먹고 무릎 꿇게 하는 등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복종하게 만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비굴한 노동이다. 노동이 비굴한 모습으로 발현되도 되는 것인가? 이는 모순이다. 노동은 수단으로서 사용될 지라도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노동 착취를 하고 노동자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폄하되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은폐된 노동. 이 또한 모순되는 표현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은 현 노동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모순을 지우고 청춘들이 제 가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함을 암시한다.

 

 

 

적당한 노동은 삶의 이유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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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게 사진이 나온 점 양해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청춘을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을 것이다. 노동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대면해야하기에 노동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우리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선 사람들과 원만한 소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태도.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이다. 그러나 나 혼자 원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즉 이기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만 편하면 돼'라는 안일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 안일한 마음이 연극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에서 보여준 가지각색 노동현장의 실체이다.

 

더 이상 청춘이 고통받지 않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지식은 지식으로 남을 뿐 세상에 반영되는 과정은 더디다. 연극은 양희은의 <상록수>가 배경음으로 깔리며 끝나지만, 노동은 여전히 계속된다. 노동은 필수적인 것이며 삶의 이유를 만든다. 하지만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현실을 계속 마주해야하는 암담한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며 '과연 살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인가, 노동을 위해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삶의 이유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필요 이상으로 노동 착취를 하여 과로사를 하기도 한다. 주객전도된 노동과 삶,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 양희은 '상록수'

 

<상록수> 가사처럼 끝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승리를 해온 과정을 기억할 것이다. 과정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노동 착취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

 

 

[양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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