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필자의 숨결 끝을 누리는 순간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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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 단어만 들어도 설레는 이들이 있다. 이리 맑으면서도 수심이 깊은 예술이 또 있을까? 규격이 없다고 서투르지는 않다. 필자가 예속하지 않고 책의 모든 순간에 참여할 때, 독자는 문장에 실린 숨결을 고스란히 느낀다. 내가 그간 들이마셨던 문장의 분자들을 또 새로운 세상에 퍼트리고자, 그간 읽었던 몇 권의 설렘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파도시집선 013 - 박솔 외 58명 지음
빛은 그 자체의 성질로서도 말하고 있듯이 광활한 존재다. 정의도, 의미도 거대하기에 언어로 풀어냈을 때 각자의 색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소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랑의 환희로, 터널 끝 희망으로, 다 읽어내지 못할 만큼 눈부신 것으로 빛은 우리에게 온다.
여기 59명의 사람이 말하는 빛이 있다. 그들이 꿈꾸는, 지향하는, 비추고자 하는 빛이 있다. 잃었던, 다 바랜, 옅어진 빛이 있다.
그 세기와 속도가 다를지언정 우리가 빛을 꿈꾸는 목적은 같다. 파도시집선의 열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빛을 말한다. 한순간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들보다 오래오래 빛날 우리를 사랑하자고 다독인다. 책을 덮은 순간, 무엇이든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우리 생
이븐
파도는 설레고 바다는 두려웠다
빛은 찬란하고 그림자는 서글펐으며
사랑은 모든 것이어서 때로 해롭고 이로웠다
나는 무광이었으나 유광일 수 있었고
당신은 무색이었으나 무취는 아니어서
어딜 가든 당신이 배어 있었다
낮과 밤을 공존하다 어느 땐 어둠에 굴복했어도
어느 땐 빛이 굴절되지 않고 당신에게 가닿길 기도했다
당신이 눈부셔 눈을 질끈 감을 때마다
한낮의 가로등은 그저 빛을 잃은 것이고
거리에 공중전화 부스는 쓸모를 다한 것이었다
나는 눈물이 고여도 쉬이 눈을 감지 않았고
필요를 아는 공중전화 부스와 때를 만난 가로등은
눈을 감지 않고도 찾아온 밤을 밝히는 것들이었다
빛이 더 널리 퍼져 사랑으로 물들길
오늘도 우리 생을 위하여 눈을 감지 않고 기도한다
2. 여름으로 지어진 곳 - 소운
이 언덕은 모든 안녕을 머금고 있다.
- 그 시선의 끝, 110p
누구에게나 공간이 있다. 머물렀던 공간, 사랑하는 공간, 잃어버린 공간. 정원과 다림의 초원사진관, 리쯔웨이와 천윈루의 38레코드, 해준과 서래의 바다. 이처럼 내가 애정하는 영화들의 공간과 유사한 어딘가들이 이곳 소동, 여름으로 지어진 곳에 있다.
너를 처음 만난 곳에서, 끝없이 시선을 맞춘 곳에서, 그리고 또다시 나를 무너지게 하는 곳에서 이야기는 영원히 기다린다. 여름은 기억을 자주 미화하는 계절이다. 은희와 산은 매 순간 사랑했으나 매 순간 이별했다. 결국에 사랑을 인정하지만, 영원에 대한 것은 미결로 남았다.
문학에서 다루는 '여름' 분위기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한 손안에 쏙 들어오는 귀여운 책 사이즈 안에, 내가 그들의 사랑 한가운데서 처음과 끝을 지켜본 것만 같은 아린 마음이 남게 될 것이다.
산이는 자꾸만 나를 꿈꾸게 만든다. 아직 열리지 않은 세상을 보여주고, 오지 않은 계절을 기다리게 한다.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러도 된다는 이유를 만들어 준다. 나는 이미 산이의 눈빛에서 느끼고 있었다. 영원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프롤로그, 38p
3. 청춘의 알리바이 - 곁준
누구에게나 그리운 청춘의 시절이 있다. 청춘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작가가 말하는 청춘은 스무 살의 자신이다. 낭만을 좇았고, 날 것의 사랑을 했던, 영원히 남겨두고 싶은 청춘의 알리바이.
나 역시 스물을 지났다. 의미부여의 나이라고 했던가. 그 숫자가 희미해지는 일이 매번 슬펐다. 곁준의 산문집을 읽는 시간은 기록의 중요성을 또다시 머금으며, 내 청춘의 알리바이를 찾아 헤매다 환히 울게 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서툴렀을 때의 사랑은 아프다. 청춘은 시리다. 그러나 그 기억으로 우리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절을 준비하고 한 뼘 자란다. 책에는 청년이 있고 설움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소설과 시와 에세이를 아우르는 명확하지 않은 영역에서 그리운 청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렇게 우리의 청춘이 기억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기를.
사실이 그랬다. 돌아올까 싶었다. 이 반지에는 곁에 있겠다는 너의 말이 새겨져 있으니, 끼고 있으면 언젠가 네가 돌아올 것 같았다. ‘나 이렇게 반지를 잘 간직하고 있었어’. 너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우스운 일이다.
살갑던 너는 없고, 살 같던 반지만 남았다.
반지 자국이 되어 남은 사랑의 고백.
반지를 떼어내고 말았다.
너와의 계절 동안 나는 많이도 탔다.
- 스물한 번째, ‘살갑던, 살 같던’ 中
4. 겨울의 작은 집 – 한주안
연말이 되면 겨울을 말하는 책들을 찾고 싶어진다. 날씨가 쌀쌀해짐으로 시린 마음이 상기되는 탓이다. 고요한 밤과 풍경이 있는 언덕 위의 집에서 한 겨울쯤 나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원일 것이다. 겨울의 작은 집은 그러한 공간에서 만들어진 눈꾸러미의 기록이다.
여행에 한 권을 지참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도피를 위한 여행이든, 영감을 찾는 여행이든 평온한 마음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겨울은 깊은 계절이라고 한다. 한기와 순백 사이 생각이 짙어지고, 사랑이 고파진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겨울의 마음 안에 언어를 밀어 넣자. 사람의 이야기로 메우고 데우자.
이 페이지는 잠시 지저분했었다. 싫은 사람에 대한 싫은 이야기를 적다가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증오를 담은 이야기도 어딘가에는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쓰는 사람이 나는 아니었으면 하는 철없는 소망이 있었다. 좋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질리는 세상이라지만, 나쁜 이야기들이 질릴 정도로 많은 세상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 '2월' 中
읽음으로 필자의 처음 결심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의 문장과 함께 흘러온 마지막 숨결을 들이마시는 일은 흔하지 않다. 작가가 모든 과정에 참여하며 순간마다 색감을 더하는 독립출판이 귀한 이유이다.
독립출판이 더 많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면 좋겠다. 특정되지 않은 활자에도 힘이 실리고, 누군가 그 가치를 알아보며 문학의 불빛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매일 더 간절하다.
[박시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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