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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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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관건은 어휘다. 우리는 항상 전하려는 바의 원형을 완벽히는 표상할 수 없더라도, 근접한 수준까지는 닮아 있는 단어를 찾아내려 애쓴다. 언어의 형태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안개처럼 모호한 마음의 한 조각을 끄집어내 얼굴을 만들어 주는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장수는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그중 한 단어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라면, 오직 우리의 힘으로 공을 들여 그 감정의 맥락을 풀어내야 한다.


그 과정이 여간 쉽지 않다 보니, 우리는 표현을 시작하려는 단계에서도 곧잘 망설인다. 어떤 조각에 ‘언어의 탈'이라는 특권을 줄 것인가를 따지며 여러 기준을 들이민다. 과연 남들이 알아줄 만한 중대한 변화인가? 현재를 바꿀 정도로 뜻깊은가? 즉 ‘드러낼 가치’가 있는가? 이 기준선을 통과하지 못한 감정들은 형체를 얻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을 정처 없이 떠돌 뿐이다.


마땅히 대변할 만한 어휘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된 감정들이 무수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해서 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더욱 미묘한 혼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슬픔에 이름 붙이기』(2024, 윌북)의 저자 존 케닉은 그들 존재를 붙잡아 세심히 살피고, 하나하나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준다. 이 책은 그가 무려 12년간 진행한 프로젝트를 사전의 형태로 엮은 책으로, 라틴어나 독일어, 불어, 영어 등지에서 빌려온 단어들을 조합해 창조한 300여 개의 신조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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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Romain Vignes

 

 

책의 원서는 아마존 베스트셀러에도 올랐고, 저자의 신조어 중에서는 실생활에서도 쓰일 정도로 정착한 단어들도 있다고 한다. 나 역시도 비록 슬픔일지언정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 새로운 감정들과 마주할 생각에 기대감이 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과연 슬픔의 종류가 삼백 개나 될까 싶은 의구심을 마음 한켠에 품은 채 표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본문은 단어-품사-해설-어원으로 구성되는 사전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나열된 단어들 중에서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 표현도 있었다. 그렇게 집중력이 흔들리려던 중에 이 책은 사전이라는 점을 떠올렸다. 책의 모든 페이지를 정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 보니 오히려 눈에 띄는 몇몇 단어들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고작 몇 초 가량이면 읽을 한 문단 남짓의 해설이 내면 깊숙한 곳을 골똘히 숙고하게 했다.

 

 

네멘시아 nementia

 

[명사] 낮아진 연의 줄을 거두어들이는 아이처럼 지나간 생각들의 흐름을 되짚어보려 애쓰며, 왜 특히 불안하거나 화가 나거나 초조한 기분이 드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내려는, 마음이 산만해진 후의 노력.

 

어원: 고대 그리스어 νέμειν némein(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다)+라틴어 dementia(정신이 없는). (p.67)

 

 

긍정적인 감정은 그 원인을 곱씹을 이유도 별다른 뒤끝도 없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그 감각이 곧 옅어질 일만 남았다는 점이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 남기는 불쾌한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한시라도 빨리 그 나쁜 기운을 몰아내려면 저마다의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아예 다른 일에 집중해 시선을 돌려버리거나, 활기찬 취미 생활로 기분 전환을 하거나, 아니면 이불 속에 파묻혀 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만일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불안감이라면, 그 사건의 해결책을 구하면 끝날 문제기 때문에 압박은 심할지언정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나의 일상이 표면상으로는 평탄한데도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젖어들 때가 있다. 너무 잔잔해서 그 정체를 알아채기도 어려운 이 감정이 순간 존재감을 드러내고 내 기분을 결정할 때, 나는 늘 집요하게 그 원인을 헤집으려고 했다.

 

내게 나쁜 감정의 돌파구는 '네멘시아'였다. 당장의 찜찜함이 어디서 온 건지, 그 출처를 질문하며 점차 후보를 좁혀 나가다 보면 대부분 비슷했다. 항상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이유였다. 네멘시아 전까진 그 우울감을 쉽게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도 그 감정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라 눈치채고 싶지 않았다는 게 차라리 맞겠다.

 

 

웰리엄 wellium

 

[명사] 실망스러운 결과를 합리화하기 위해-그 매진된 공연은 어차피 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는, 안전하게 지원한 학교가 실은 자신에게 더 맞았다는, 꿈에 그리던 직장은 어차피 들어가봤자 스트레스만 심했을 거라는 식으로-생각해낸 변명.

 

어원: ‘음Well, 나는…… 그러니까um…….” 보통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하는 말. (p.75)

 

  

단어들을 읽다 보면 한글 음차로는 원어의 뉘앙스를 캐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사이에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웰리엄'으로, 어원을 확인한 뒤 되뇌어 보면 어떻게 봐도 적당히 얼버무리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추임새다. 해설을 봐도 마찬가지다. 웰리엄으로 애써 위안 삼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온갖 기대감을 품었다가도 결과가 마음같지 않았을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태도를 바꾼다. 순간 밀려오는 좌절감에 압도당하지 않고 멘탈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억지스러운 방어기제다. 어차피 내게는 필요하지 않았다고,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위안 삼으며 원래의 의욕을 사정없이 꺾어 버리길 불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실 웰리엄이 초라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애써 눈감는다. 사실의 여부보다도 당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당장 겪은 실패를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로 치부하는 것이다. 지금의 아픔이 한시라도 빨리 과거가 되어야 실망감을 떨쳐내고 비로소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푼트 킥 punt kick

 

[명사] 마치 인생이라는 게임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어 이제는 완전히 다른 토큰을 들고 전진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지금껏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전략이 더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이제 더 나은 존재가 될 때가 왔다고 - 귀엽거나 친절하거나 올바르거나 강인한 것으로는 이제 충분치 않다고- 느낄 때의 조용한 가슴 떨림

 

어원: 네덜란드어 puntstuk(철차轍叉, 두 철로가 교차하며 철로가 바뀌는 지점). 때로 당신은 당신이 탄 기차가 철차를 지나갈 때 약간의 스릴kick을 느낄 수 있다. 마치 그것이 똑같은 철로에서 너무 오래 달린 당신이 철로를 바꿀 때를 놓칠까봐 세상이 보내주는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p.72)

 


책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마냥 불행한 슬픔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슬픔으로 종결되는 감정은 당연스럽게도 아픔을 남긴다. 하지만 슬픔이 또 다른 감정을 낳는 경우도 있다. '푼트 킥'이 그 중 하나로, 이제까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는 이 감정에는 두려움과 설렘이 섞여있다. 변화를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은 원래의 상황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서늘하게 깨우치는 순간이다.

 

'푼트 킥'은 지금의 모습으로는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자기 객관화인 동시에, 이젠 비로소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결단이다. 우리의 삶에서 특정한 안정 궤도만을 유지한다는 건 꿈만 같은 이상이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지금의 상황에는 언제나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변화가 나를 억지로 바꿀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방향을 미리 예견하고 스스로 발걸음을 뗄 것인가. 바로 푼트 킥이 그 차이를 만든다.

 

*

 

"그렇다. 나의 단어는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모든 단어는 만들어진 것이다." (p.292)

 

저자는 맺음말에서 비단 이 프로젝트로 태어난 단어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단어들도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해 신조어든 표준어든, 모든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필요에 의해 창조된다. 어떤 단어건 저마다의 목적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책에 빼곡히 실린 단어들의 목적은 기존의 어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을 똑바로 호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또 다른 목적이 보인다. 구태여 설명하기에도 민망했던 그 나약한 감정들이 실은 당연했음을 일깨우고, 그 힘듦이 당신 혼자만의 골칫거리가 아니었음을 표명하며 얼굴 모를 서로간의 동질감을 누리게 한다. 그리고 홀로 두었다면 마치 한을 풀지 못한 혼령처럼 어딘가를 떠돌았을 작은 슬픔들을 따뜻하게 보듬는다. 그렇게 형체가 생긴 슬픔이라면 도리어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희망을 안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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