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친부 살해의 욕망, 그러나 친부의 모습을 한 아들 - 연극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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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는 이번이 세 번째 상연이다. 2016년에 3년간의 연구를 통해 7시간 공연으로, 2021년도에 1부와 2부로 나누어 6시간 동안 공연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라는 부제를 달고 3시간가량의 공연으로 구성했다. 이 작품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하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원작으로 한다. 그렇다면, 연출 나진환은 이 작품에서 왜 ‘이반과 스메르자코프’에 집중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를 집중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잠시 표도르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공연에서는 배우 정동환이 원작 소설의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표도르를 함께 연기한다. 그는 작가로서 이 작품의 일부분을 관객에게 시연하고자 하며, 시연하는 장면에서는 직접 극 속으로 들어가 표도르와 대심문관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작가가 자신이 쓴 부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을 통해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압축적으로 줄여냈다. 다만, 각 장면이 시연되기 전, 작가의 장면 설명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인 부분만을 다루다 보니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으로서 본 공연이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전반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가지고 가는지를 쉽사리 파악하기 다소 어려웠다.
공연의 첫 장면은 표도르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이반과 셋째 아들인 알료사와 식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표도르는 두 아들에게 “신은 있는가?”, “불멸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있어 알료사는 “있다”고 말하는 반면 이반은 “없다”라고 답한다. 본 작품은 이렇게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반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신인사상을 가진 인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이 부분에 있어 잠시 연출의 말을 빌리고자 한다.
“이 작품은 3시간 동안 신의 정의에 반기를 들고 인간 정의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이반의 고뇌와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반과 그의 분신이자 사상의 실체적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반은,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는, 신이 인간이 되어 인류를 구원한다는 인신사상(人神思想)에 맞서 인간이 신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신인사상(神人思想)을 주창한다. 하지만 결국 그의 발버둥은 자기가 가장 혐오하는 유형의 인간인 자기 아버지의 영혼을 가장 많이 닮은 인간이었고 그의 사상을 따르는, 즉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사상을 따르는 스메르자코프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즉, 이반은 자기가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일종의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에 절어 있는 교만의 인간이며 위선 가득한 냉소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이 폭로된다. ... 그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실존적 절망을 처절하게 인지하고 그것에 끝까지 저항하고 투쟁한 절망의 인간이었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
그렇기에,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이반과 스메르자코프(표도르의 서자)가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이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는 계속해서 마주 본다. 표도르가 살해된 이후 이들의 마주 봄은 더욱 강화된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는 거울 앞에서 수많은 대화를 나눈다. 거울은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반사해서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위치에 따라 그들의 모습을 왜곡시켜 변형하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이를 통해 대사가 진행됨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진흙과 검은색과 빨간색의 물감을 사용되고, 이를 통해 이들 간에 존재하는 욕망이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는 이것을 ‘뒤틀린 욕망 또는 추악한 욕망’이라고 해석했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말에서 ‘진흙’이 의미하는 바가 욕망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동일한 맥락으로 보았다. 더불어 우리는 모두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인 만큼, 진흙은 욕망에 더럽혀진 존재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의 얼굴에 진흙이 덧발라질수록 그들은 내면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그들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낸다. 특히, 이반은 자신의 감춰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주는 스메르자코프의 심문,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대화 같은 대화를 이어 나가며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다. 이때, 아버지 표도르의 죽음은 큰 화두가 아니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보다 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는지의 과정에 살펴보며 두 인물, 사실상 한 인물인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본다.
이때, 특기할 만한 것이 이러한 과정이 앞선 대심문관과 예수의 심문 과정과 시각적으로 거의 유사한 연출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진흙, 검은색 그리고 붉은색 물감 그리고 가시관. 이렇게 예수와 겹치는 이미지를 갖게 된 이반은 예수를 가둔 자들이 그에게 고통을 주고 조롱했던 것처럼 이반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 실질적으로 자신의 인간성과 윤리성의 타락을 강력하게 부인하며 스메르자코프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친부 살해는 단순히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곧 기성세대이다. 이반은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표도르를 보면서 부조리한 인류의 모습을 목도한다. 이반은 신을 믿지 않는 만큼,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자신은 아버지와는 다름을 증명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스메르자코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마주한 이반은 자신 또한 자신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렇기에 이반은 자신이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죽였음에도 여전히 부조리한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추악한 모습이 된 자신의 모습을 목도하며 점차 정신을 놓아버리고, 자신이 부친을 살해했음을 재판장에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반이 마주 보던 표도르는 항상 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대란 무엇인가? 광대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특권을 부여받은 이들이다. 광대로 분한 표도르는 거리낌 없이 말한다. 심지어, 친부 살해를 자행한 것을 부인하는 이반 앞에 나타나 이반 또한 표도르 자신과 다를 바 없음을 이야기하며 그의 위선을 조롱한다. 친부 살해 후 섬망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해지는 이반은 결국 자신의 아버지 표도르와 광대의 이미지를 겹쳐 보게 되고, 스메르자코프와의 대화에 이어 자신이 혐오했던 대상과 자신이 결국은 다르지 않다는 추악하고도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사실상 본 작품은 표도르, 이반, 그리고 스메르자코프를 중심으로 하여 극을 전개한다. 그리고 표도르에서 이반으로, 그리고 이반이라는 인물을 통해 결국은 인류를 조망하려는 본 작품의 메시지는 이 외에도 다양한 도구를 통해 드러난다. 라이브 캠과 노래의 사용이다. 공연 중간중간 라이브 캠이 사용된다. 라이브 캠은 이반과 표도르의 얼굴을 굉장히 근접하게 찍어 송출한다. 이때, 자신이 죽이고자 했던 대상을 닮아가는 이반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보여주고, 이 둘의 연결되는 표정을 조망함으로써 표도르와 이반의 매우 불편한 유사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이 라이브 캠의 사용이 효과적이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남는다.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만큼 라이브 캠이 비추던 인물의 표정 그대로를 보기에는 라이브 캠이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더라도 충분했다. 만약, 대극장이었다면 이러한 연출이 필요했겠지만 말이다.
노래는 극단 피악이 항상 쓰는 매개체이다. 피악은 항상 노래를 통해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굉장히 낭만적이면서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이번 작품에서 노래는 집시를 떠올리는 여인에 의해 극이 전개되는 동안 여러 차례 반복되어 불린다. “저주스러운 가문의 유령이여 춤을 추어라. 오지 않을 밝은 내일 아침이여 애통하여라. … 어리석은 인간이여, 상처받은 인간이여, 슬픔을 노래해라”. 이를 통해 이는 단순히 카르마조프가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인류의 모습임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다만, 이때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모습이 극 전반적인 미감과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극의 방관자로서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 공연 프로그램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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