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명 대신 멍멍을 [문학]

글 입력 2024.05.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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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내가 놀이터에서 뛰어 놀던 때, 집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엄마는 ‘엄마!’하는 외침만 들려도 밖을 내다 보았다고 한다. 소리의 주인이 나인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나 역시 길을 걷다 ‘학생!’하는 소리에 자주 돌아보지만, 나를 부른 것이 아님을 깨닫고 머쓱하게 돌아선 적이 잦다. 사실 누구에게든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요, 저기, 아가씨, 선생님, 아저씨, 사장님... 시골 강아지는 전부 바둑이이고 고양이는 전부 나비이고 누구든 어디서든 쉽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

 

모두 고유한 이름을 가진 존재라지만 명명은 자주 겹친다. 내가 나로서의 고유성뿐 아니라 ‘학생’과 같은 보편성도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세상에 무사히 안착하는 방식일지 모른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주체뿐 아니라 타자로서의 나에 대한 이해 역시 필요한 것이다. 강보원 시인의 <완벽한 개업 축하 시>중, ‘마루야’하고 부르자 백한 마리의 푸들들이 몰려나오는 <저택 관리인>의 묘사에 기시감이 든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저택관리인/ 강보원

 

마루야, 하고 나는 마루를 불렀는데 방 안에 있던

푸들들이 다 우르르 달려오는 거야 백 한 마리나 되는 이 푸들들의 이름을 다 마루라고 한다면 겹치는 걸까?

겹치면 더 좋겠지...... 나는 구분 가지 않는 것들을 사랑해

그 불가능성이 그 푸들들을 전부 다 사랑하게 만들었지

어쩔 수가 없어서 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렇게 나는 푸들들에 둘러싸여서 산더미 같은 개밥 포대를 뒤적거리며 살고 있어 하지만 가끔은

 

나는 몸이 하나인데 푸들들은 너무 많다, 너무......

너무 깜짝 놀라서 울고 싶어지는 거야 이렇게

 

멍멍

멍멍,

하고

 

 

화자는 백 한 마리의 푸들들의 이름을 전부 마루라고 짓는 상황을 가정해본다. 그리고 구분 불가능성이 그들을 사랑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상하다. 우리는 이름의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온전한 주체로 세우는 것, 나아가 대체 불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름으로 대표되는 고유함이라고 여긴다. 이름을 소유하는 것이 주체성의, 사랑 받는 존재의 필수 조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저택 관리인>은 ‘마루야!’라는 말에 반가움을 표하며 달려오는 푸들들처럼, ‘엄마!’ 소리에 놀라 뒤도는 일련의 집단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명 ‘어쩔 수 없는’ 측면 역시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고유한 것들, 이름을 가진 것들뿐 아니라 기꺼이 하나의 명명을 공유하는 덩어리 자체를 사랑할 때가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추상의 덩어리를 사랑하면서 개체를 사랑한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또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푸들 개체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고유성을 인정하는 순간 화자는 각자의 조건에 맞는 서로 다른 사랑을 제공해줘야 한다. 이건 ‘관리인’으로서 상당히 고된 일이다. 그럴 바에 모두 ‘마루’라고 부르며 ‘마루’만을 충실히 사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나는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푸들’이나 ‘마루’에 가까운 덩어리진 개념이라고 느낀다. ‘타자를 사랑하자’라는 다짐은 쉽게 가능하며 당위성까지 지니지만, ‘a를 사랑하고 b를 사랑하고 c를 사랑하자’는 좀 다르다. 난해한 현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며 금세 피곤해진다. 비슷한 맥락으로, 인간이라는 덩어리진 개념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변에 있는 인간 개체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게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랑을 필요로 하고, 같은 개밥을 먹으며 살아갈 수 없다. 저택 관리인으로서 언표된 화자는 개밥 포대를 뒤적거리며 주체의 홀로됨을 절실히 깨닫지 않았을까.

 

<저택 관리인>은 사랑을 주는 입장뿐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행이 바뀌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몸이 하나인데 푸들들은 너무 많다고 말하며 화자는 울고 싶은 기분에 시달린다. ‘멍멍’하고 꼭 푸들처럼 울고 싶어진다는 건 이 저택에서 오직 구분 가능한 개체로서의 외로움을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리인이 아닌 푸들로, 구분 불가능성 사이로 섞여들어 그들처럼 우는 것만이 이를 해소할 방법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덩어리진 사랑은 개별적이지 않은 사랑이고, 이는 곧 특별하지도 않은 사랑이니 받는 입장에서 부담이 덜어진다. 때로는 모호하고 묽은 사랑이 건강할 때가 있다.

 

화자는 명명 대신 '멍멍'을 택한다. 푸들을 모두 '마루'라고 뭉뚱그리며 마루에게 충실한 사랑을 줄 것을 다짐하지만 결국 그들과 유사한 울음을 내어보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명명도 멍멍도 어느 하나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평생 그 사이를 방황할 것임을 짐작할 뿐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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