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4.0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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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게 남아있는 인생의 궤적을 상상하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지금껏 상상해 보지 못했던 미래의 가벼운 솔직함을 혼자 그려보기도 하고, 어느 순간 부질없게만 느껴지는 나의 망상들과 침묵 속에서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경우도 잦다.

 

인터넷 서점을 구경하던 중 "이 소설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 제대로 시작할 수조차 없다."라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문장과 함께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책,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지금 돌이켜보면 나답지 않게 퍽 충동적으로 이 책을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어째서였을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여기저기로 뻗어나간 나의 망상들이 스토너에게까지 닿아 그 역시 다소 충동적으로 나를 자신의 평범한 인생 속으로 한번 초대했던 것 뿐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먼 길을 돌아 오래전 종착역에 도달한 그의 인생을 상상하는 일. 두 번 책을 정독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헤어진 지 벌써 반 년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그를 떠올리게 되는 날에는 여전히 즐겁고 여전히 서글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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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을 찾아본 적은 없지만 책에 대한 이런저런 짤막한 후기를 보면 대부분 스토너라는 인물의 삶을 인정해 주고 긍정하는 문장들이었다. 작가 존 윌리엄스 역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의미라. 과연 그가 얻은 의미가 실재하는 것이었을까? 물론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며 그의 인생을 함께 따라간 독자라면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 역시 그가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대학의 조교수로서 이루어왔던 것들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일과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진정으로 요구하고 의욕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감추기 힘들다.

 

"인생의 의미보다 삶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형님 이야기처럼 논리에 앞서 우선 사랑을 해야하는 거예요.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만 해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알게 되는 거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두 인물 알료샤(동생)와 이반(형) 사이의 대화이다. 알료샤라는 인물이 대변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차치하더라도 위와 같은 인생관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살다가 한번쯤 스스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위 관점에서 볼 때, 스토너와 같은 사람들의 삶은 분명 선후관계가 역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거들고, 이디스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대학에서 만난 여러 적대적인 인물들과 갈등을 빚고,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 적이 없다. 단 두 번의 경우를 제외하면.

 

문학과 캐서린. 바로 이 두 존재만큼은 스토너에게 있어서 사랑 그 자체였다.

 

우선 스토너가 자신의 부모가 얼마나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지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농과대에 진학시켰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성장하는 문학적 감수성과 호기심에 이끌려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바로 사랑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을 스토너 자신보다 먼저 알아챈 그의 담당 교수 아처 슬론은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첨언이지만, 한 소년이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뒤이어 자연스럽게 문학도의 꿈을 꾸게 되는 과정을 작가가 이토록 섬세하고 밀도 있게 그려낸 점에 대해 책의 초반부를 읽는 내내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문학을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토너>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캐서린의 경우 어떻게 스토너에게 사랑이 될 수 있었을까. 스토너는 캐서린과 사랑을 나눌 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

 

반면 그가 이디스와의 결혼이 실패작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부인이 매일같이 불행해 보인다고 생각할 때 그 자신도 불행 속으로 침잠했다. 도저히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사랑할 수 없었던 그가 결혼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한 행동을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자신의 부인과 딸을 사랑하기도 전에 그들 존재의 의미부터 찾기 위해 애를 썼으니 그가 한 인간으로서 점점 불행해져만 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그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겠지만.

 

그런 점에서 캐서린은 스토너에게 문학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 그녀와 나누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스토너와 캐서린이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고 헤어짐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비단 현실과의 타협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성정과도 같은 것들을 고려할 때,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라는 이름 하에 적당한 끝맺음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스토너가 캐서린에게 설명한 작별의 이유를 지금까지도 좀처럼 인정할 수가 없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모든 것이...... 우리가 했던 모든 일과 우리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오. (중략) 우리 둘 다 지금과는 다른 사람, 우리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야."

 

스토너에게는 캐서린과의 사랑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 의미라는 것이 정말 필요했을까? 도대체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평생토록 찾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스토너는 임종 직전까지도 스스로에게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던진다. 나는 그것이 그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갈구했으나 끝내 무엇도 잔재해 있지 않은 '공허한 의미'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습관처럼 의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나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의미라는 단어를 사용한 여러 문장들을 발화하고 쉽게 잊는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의미가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맞을까. 설사 매 순간마다의 의미라는 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의미를 이해하고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의미는 왜곡되어 버리거나 혹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비록 스토너라는 인물의 인생을 내 나름대로의 기준에서 '실패'라고 규정하기는 했으나 그는 여전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인생의 궤적을 그려나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을 덮은 순간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아직도 내 귓전에 맴돈다.

 

의미로부터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나는 그것들 전부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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