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익숙함에 속아 새로움 마주하기 -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공연]

친숙함을 낭만 있게, 그리고 다양하게
글 입력 2024.03.2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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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포스터]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jpg

 

 

루틴 있는 삶보다 되는 대로 사는 삶에 익숙한 내게도 단 한개의 리추얼(규칙적인 의식)이 있다. 바로 집중해서 무언가를 빨리 해내야 하지만 생각이 많아 우왕좌왕할 때 ‘지브리스튜디오 OST’를 듣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부 종합 전형을 위한 자소서를 작성하다 거북이 같이 느린 넷북이 과부화에 걸려 90% 가까이 작성한 자소서를 통으로 날렸던 적이 있다. 90%라는 진행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소서 작성한지 일정 시간이 흘렀고 마감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갑작스럽게 넷북이 먹통이 된 재난 발생으로 입시로 예민했던 나는 분에 못 이겨 눈물을 줄줄 흘리고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간 정도 우니 발등에 불이 타기 시작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고 우는 것도 사치라고 느껴 스스로 마음을 안정하기 위해 음악을 찾았다. 그 때 지브리스튜디오 OST 모음집을 알게 됐다.

 

거짓말처럼 지브리스튜디오 OST가 나오기 시작하니, 마음이 차분해졌고 기억을 더듬으며 자소서를 빠르게 복구했다. 오히려 기존 틀에서 살짝 수정된 버전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마치 헐크처럼 마음이 너무 조급하거나 화가 날 때면 지브리스튜디오 OST를 듣고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런 내게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이 나타나다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겠는가. 사실 어렸을 때 엄마 손 잡고 들었던 클래식 공연에서는 잔 기억이 더 많지만, 지브리스튜디오 OST를 믿고 클래식 공연을 도전하기로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내 자의로 클래식 공연장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혜화역 소극장처럼 작은 공연장을 생각했지만 롯데월드몰에 위치한 롯데콘서트홀은 2층이면서 양옆과 공연장 뒷면까지 좌석이 있는 큰 규모를 자랑했다. 사람 또한 1층과 2층 모두 대다수 자리가 차 있었다. 무대에는 피아노 한 개와 의자 4개가 준비돼 있었다. 자리5개에서 알 수 있듯, 이 공연은 앙상블(2인 이상 하는 노래나 연주) 형태로 송영민 피아니스트, 임홍균・박진수 바이올리니스트, 이신규 비올리스트, 박건우 첼리스트이 참여했다.

 

낭만시대 대표 서정적인 음악가 쇼팽의 음악을 오늘날 대중에게 친숙한 대표 현대음악 지브리스튜디오 OST를 통해 소개해, 클래식의 벽을 허물고 싶었다는 기획의도 소개로 공연의 막이 올랐다. 클래식으로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공연이기 때문일까? 1,2부 시작은 물론 한 흐름이 끝날 때마다 송영민 피아니스트의 해설이 있었다. 선곡 이유부터 어떻게 편곡을 하고, 두 곡 사이 유사한 지점은 어떤 부분인지 짧게 맛보기로 보여주어 이해가 쉬었다. 클래식 초보에게 적격인 공연이다.

 

왈츠의 특징은 강약약. 녹턴의 뜻은 야상곡. 에튀드는 곧 연습곡. 플로네이즈는 공작새와 같이 남성의 클래식의 기초도 모르는 나로서는 중간중간 있는 해설이 참 다정하고 클래식에 대한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 1부는 잔잔하고 서정적인 곡들로 이뤄져 있었고, 2부는 활기차고 친숙한 노래로 구성됐다. 따라서 1부의 주제는 쇼팽(낭만시대 서정적인 작곡가) 곡에 숨겨져 있는 지브리 음악, 2부는 지브리 음악 속에 숨겨진 쇼팽 음악이다. 어쩔 수 없는 지브리스튜디오 OST 덕후는 2부에 마음이 좀 더 기울었다.

 

2부에 내 지브리 최애 영화 탑 2(이웃집 토토로, 벼랑 위 포뇨) OST가 있는 탓도 컸다. 토토로 음악을 듣는데 영화 속 장면들이 머리 속에 자동으로 펼쳐져 행복했다. 사실 지브리스튜디오 OST 최애곡은 ‘인생의 회전목마’이지만, 개인적으로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곡은 ‘천공의 성 라퓨타 중 너를 태우고’ 였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발견이었다. 내가 마치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이 된 것처럼 웅장한 소리에 둘러 쌓여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바이올린의 현이 떨리는 소리가 이렇게 좋았나? 음이 높아질수록 현이 떨리는 느낌이 명확해져 듣는 내내 생경한 기쁨으로 가득찼다. 피아노는 조약돌 같이 맑았고 첼로의 묵직한 느낌이 귀를 사로잡았다. 비올라가 현을 튕길 때는 기포가 터지는 것 같았는데, 이 모든 소리가 앙상블로 어우러질 때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특히 다함께 현을 위로 높게 들며 곡의 종료를 알리는 세레머니가 멋있었다.

 

공연에 대한 총평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친숙함을 낭만있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다독가들이 독서를 습관화하고 싶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조언하는 게 있다. 바로 좋아하는 장르부터 읽으라는 것. 친숙하고 익숙한 것부터 접하면서 점점 반경을 넓히는 것이 효과적이라 것이다. 클래식도 책과 같은 문화예술로서 먼저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통해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공연은 지브리 곡들에 대한 친숙함으로 쇼팽 음악의 낭만을 쉽고 다양하게 풀어냈다. 맑았다가 강인하다가 아련했다가 속도감이 확 올라갔다가.

 

피아노와 현악기가 주거니 받거니하는 클래식 앙상블을 원래 좋아하는 사람, 지브리스튜디오 OST의 오랜 팬이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클래식을 잘 몰랐던 사람도 좋다. 한 번쯤은 들어본 지브리스튜디오 OST의 익숙함에 속아 클래식이라는 새로움에 퐁당 빠져보는 것이다. 100년 간극이 무색하게 서로 비슷한 음악에 금방 마음이 녹을 것이다.

 

 

[이도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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